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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Apr 21. 2022

운명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삶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알 수 없는 곳으로, 예상하지 않았던 곳으로, 바라지 않는 곳으로, 불행과 아픔이 있는 곳으로 삶이 흘러간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운명의 힘은 내가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따라야만 하는 것일까? 이이화의 <시인의 별>은 고려시대 안현의 슬픈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이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다. 서해의 투명한 공기 속에 먼 하늘을 물들이는 낙조가 점점 짧아 갈 무렵 그 일은 일어났다. 빨래를 하고 돌아가던 아내가 이아치의 눈에 띄고 말았던 것이다. 이튿날 안현은 이아치의 유배소에 불려 갔다.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이아치는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안현은 고개를 조아리고 방 바깥의 마루에 엎드렸다. 이아치는 이마를 찌푸리고 그를 노려보다가 손으로 삶은 양고기의 한 부위를 쫙 찢었다. 그리고는 난폭하게 이빨로 뼛조각을 떼어 내고 소금을 친 고기 국물에 살점을 흠뻑 적셔 입으로 가져갔다.

  ‘어제 내가 본 여자가 네놈의 안식구라지?’”


  안현은 시를 사랑하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아내를 얻었고, 비록 한직이기는 하나 대청도의 관리로 일하고 있었다. 운명은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이런 조그만 섬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몽골제국의 왕족이었던 이아치는 몽골 황제의 벌을 받아 대청도로 유배를 오게 되었고, 이곳에서 안현의 아내를 한 번 보고는 자신의 여자로 삼으려 했다. 


  “이제는 죽기를 각오하고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벌써 닭이 울고 날이 밝으려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뒤뜰의 싸리나무 울타리를 뜯어내고 집을 빠져 나왔다. 가장 가까운 나루터에서 두 사람은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작은 쪽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이들의 탈출은 금방 발견되었고 이아치의 부하들은 여러 척의 배에 나눠 타고 안현의 뒤를 쫓았다. 멀리 육지의 흰 물결이 보이는 곳에서 두 부부는 몽골인에게 사로잡혔다. 몽골인들은 안현을 철퇴로 갈겨 바다에 차 던지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대청도로 돌아갔다.”


  안현에게는 이아치를 대적할 힘이 없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도망가지만, 이아치의 부하에 의해 곧 붙잡혔고, 거의 죽을 뻔한다. 그의 아내는 어김없이 이아치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간신히 목숨을 건지 안현은 그의 아내를 찾아 나서지만 이미 그의 아내는 이아치가 데리고 몽골로 떠난 후였다. 안현은 아내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몽골로 향하고 10년 동안 갖은 고생을 다해 간신히 아내를 찾게 된다. 


  “부인이 이를 드러내며 웃는 순간 안현의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지워졌다. 심장으로부터 쿵쾅거리며 쏟아진 물결이 가슴에 세차게 굽이치며 이 생각 저 생각을 싣고 흘렀다. 안현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부인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웬 때에 절은, 얼굴이 검고 곳곳에 동상 자국이 생긴 늙은 종놈이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한동안 잠자코 있던 부인은 마침내 화가 난 얼굴로 걸어왔다. 무례한 종놈을 들고 있는 말채찍으로 때려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채찍을 치켜들던 부인은 갑자기 몸을 떨었다. 눈을 크게 뜨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돌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어 언제까지고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안현의 아내는 이미 이아치의 손을 떠나 몽골 영주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또한 안현과는 아이가 없었지만, 몽골 영주 사이에는 자식도 있었다. 10년이라는 세월은 모든 것을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안현은 아내에게 옛날 서로 사랑했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자신과 떠나자고 하지만, 안현의 아내는 이미 스쳐지나간 인연은 끝이 난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녀에게는 버릴 수 없는 자식과, 가난했던 안현과는 다른 부족함이 없는 영주라는 남편이 있었다. 지나간 사랑은 과거의 것이고 현재를 지키는 것이 그녀의 선택이었다. 


  “한순간에 일어났지만 시경의 시들이 영원으로 봉인해 버린 사랑의 메아리. 부부의 다정한 눈동자에서 태어나 모든 살아 있는 것과 하나가 되는 사랑과 덕. 공자께서 돌아가시고 미언이 끊어진 뒤 모든 시인들이 그려 왔던 그 심원하고 아득한 길이 갑자기 안현의 눈앞에 열리는 듯했다. 안현은 땀에 흠뻑 젖어 잠에서 깨어났다. 비틀거리며 천막을 나서자 홀연 머리 위에 눈부시게 밝은 세계가 그의 시계를 가득 채웠다. 그것은 칠흙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하얀 불꽃처럼 타오르는 별들이었다. 안현은 두 팔을 벌리고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그 별빛을 껴안았다. 오래 전에 잊어버린 그의 별, 멀고 외로운 젊은 날의 별이 다시 보였다.”


  운명이라는 아픔에 안현은 절망했다. 시를 사랑했던 안현, 그에게는 아직까지도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같은 존재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그 희망을 믿었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별은 한낱 젊은 시절의 별이었을 뿐이었다.


  “안현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황야는 세상 끝까지 뻗어 가지만 그 위에는 억만년 저런 별이 빛나고 있다. 그러나 그때 북풍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맹수처럼 웅웅대면서 질주해 왔다. 안현은 일순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선 듯했다. 지평선의 끝에서 끝까지 세계는 온통 모래들의 우수에 찬 외침, 휘어져 신음하는 나무들의 울음, 흩날리는 티끌과 지푸라기들의 슬픔으로 가득 찼다. 안현은 두려움을 떨쳐 버리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몸서리를 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는 자신의 볼품없는 거처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대신 황야에 쫓기듯 아수친의 거처로 걸어갔다. 그날 밤 아수친의 천막에서 정확히 어떤 말다툼이 있었는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먼동이 틀 무렵 아수친의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간 경비병들은 피 묻은 칼을 쥐고 있는 안현을 현장에서 체포했다.”


  슬픈 운명에 대적하기 위해 그는 최후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운명에 대항하였으나, 그에게는 운명을 극복할 힘이 없었다. 


  시인인 안현에게는 자신이 바라보는 별이 사라진다면 더 이상 아무런 살아가야 할 이유도 존재할 의미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별과 같은 존재를 스스로 없앨 수밖에 없었다. 슬픈 운명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그렇게 앗아가 버렸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운명에 저항할 힘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일까? 그러한 운명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운명을 받아들이고 수긍해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의 존재는 운명이라는 커다란 힘 앞에 그토록 나약한 것일까? 오늘 밤에도 시인의 별은 빛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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