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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May 08. 2022

나는 오래 살 것이다

  친구야,

  우리는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을까? 비록 우리의 나이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삶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아. 초등학교 친구는 20살이 되기 전에 죽었고, 대학교 때 친구는 서른 살쯤 갑상선암으로 결혼하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고등학교 때 내 앞에 앉아서 열심히 공부해서 사법고시를 일찍 합격하고 부장판사까지 한 친구는 40대에 세상을 떠났으니 죽음이 언제 어떻게 올지 알 수는 없을 것 같아. 


  오늘 일요일이라 시간이 조금 있어서 이승우의 <나는 오래 살 것이다>라는 소설을 읽었어. 작가는 왜 제목을 이렇게 지었을까? 소설을 읽어보기도 전에 주인공은 순탄한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자신의 명대로 살지 못한 채 일찍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1년밖에 살지 않을 것이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마 맞을 것이다. 하기야 6개월밖에 살지 못할 거라는 선고를 받은 사람이 5년 넘게 살아 있기도 하고, 오장육부가 모두 멀쩡하다는 진단을 받은 사람이 병원 문을 나서다가 자동차에 치여 목숨을 잃기도 한다. 병으로만 죽는 것이 아니고, 사고로만 죽는 것도 아니다. 병이 있다고 일찍 죽는 것도 아니고, 병이 없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다. 확실한 것은 없고, 장담할 수 있는 은 더욱 없다. 세상은 확실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가능한 확실한 장담은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다. 당장이든 열 달 후든 50년 후든. 그렇지만 내가 1년밖에 살지 않을 거라는 건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마 맞을 것이다.”


  주인공은 왜 1년이면 충분하다고 했던 것일까?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길래 삶에 대해 미련이 없는 것일까? 어쩌면 삶에 대해 이렇게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인공인 그가 삶에 대한 애착도 없고 삶의 의미를 더 이상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다는 뜻일 거야.


  “외환 위기와 구조 개혁 바람이 불면서 그의 회사는 채무 비율이 너무 높은 악성 기업이 되었다. 과감한 해외 투자는 재산 도피의 수단으로 매도되었다. 수습을 위해 계열사를 처분하고 인원을 줄이겠다는 방안을 내놓았지만, 힘에 부쳤다. 계열사 매각은 흐지부지 시간만 흘러갔고, 인원 감축은 노조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그를 악덕 기업주로 간주했고, 회사를 파산으로 몰고 간 무능한 경영자로 내몰았다. 노조원들과 담판을 짓겠다고 들어간 농성장에서 그는 달걀 세례를 받았고 옷이 찢겼으며 무릎꿇림을 당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당하는 수치이자 굴욕이었다. 수치와 굴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날, 정부와 채권단은 그의 경영권을 박탈하는 결정을 내렸다. 하루아침에 회사를 빼앗긴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 소설은 외환 위기 이후 바로 쓰인 소설이라 당시의 시대 상황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이지만, 이러한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주변에 일어나는 것 같아. 그 당시가 IMF 사태였다면 지금은 코로나 상황이겠지. 요즘도 코로나로 인해 전국적으로 망하는 사업체가 수도 없이 많을 거야. 


  주인공은 회사를 위해 평생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일해 왔어. 하지만 운명은 그 모든 것을 한순간에 모두 날려버렸지.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그는 어떤 것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자기의 인생이 그렇게 끝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불쑥불쑥 치솟는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밤에 깨어 일어나 괴로워하며 벽을 치고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게 될 줄은 정말 몰랐었다. 단속적으로 찾아오는 울화와 수치감, 그리고 자기의 인생이 끝났다는 깊은 절망감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는 칩거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는 자폐의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뒀다.”


  아무리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고 해도 버티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사실 많아.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그러한 희망조차 없는 암울한 절망 속에 빠진 사람에게는 그러한 이야기는 전혀 의미 없는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슴 깊이 알고 있을 거야. 


  소설에서의 주인공이 자신은 오래 살 것이라고 목청껏 소리 지르지만 자기 삶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러한 절규를 한 것이 아닐까 싶어.


  삶의 무게를 버티려 해도 버틸 수 없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그러한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지만, 폭풍우에 낙엽이 쓸려가듯 그의 남은 생은 너무 연약하고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거야.


  안타깝지만 그것이 현실이고 한계이기에 운명은 결국 그의 삶에 종지부를 찍어 버리고 말아. 가슴 아프고 슬픈 현실은 그렇게 소중했던 이 세상의 그의 시간을 끝내버리고 말았어.


  우리에게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들, 목표로 하고 있는 것들, 정말 이루고자 하는 것들을 성취할 수 있을까? 우리들의 운명은 우리가 원하는 삶을 쉽게 허락할까? 아마 어느 정도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일부는 그렇지 못할 거야. 


  돌이켜 보면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지만, 내가 결코 바라지 않는 일들이 예전에 일어났고, 아마 앞으로도 이와 비슷하게 그러한 아픔의 일들이 또 일어날 것은 당연할 것 같아. 


  그래도 주인공처럼 오래 살겠다고 절규하지는 않을 생각이야. 나는 지금도 살 만큼 살았다는 생각도 들고, 삶이라는 것이 그리 특별하지도 않다는 것을 느껴. 그저 오늘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이제는 나의 삶의 목표가 되어버렸으니, 주인공처럼 그렇게 눈물 흘려가며 절규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한 절규가 오히려 더욱 가슴 아프게 만들기만 하니까. 


  친구야, 

  너도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고 그저 평범하게 조용히 삶을 즐기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너무 열심히 살지도 말고, 대충 사는 것도 어쩌면 더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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