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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May 18. 2022

빠삐용은 왜 계속해서 탈옥했을까?

영화 <빠삐용>은 앙리 샤리에르가 직접 경험한 자신의 이야기를 쓴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어릴 적 스티브 맥퀸과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너무나 인상이 깊어 지금까지도 영화의 많은 장면이 뇌리에 남아 있다.


  영화에서 빠삐용(스티브 맥퀸)은 금고털이의 죄를 범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을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기아나로 보내진다. 빠삐용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받아주지 않는다.


  기아나로 가는 뱃속에서 위조지폐범이면서 부자였던 드가(더스틴 호프만)를 만나게 된다. 배에서 빠삐용은 드가에게 탈출을 하기 위한 돈을 받는 대신 허약했던 드가를 보호해준다는 약속을 한다. 드가는 자신의 아내가 많은 돈을 써서라도 자신을 감옥에서 꺼내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징역을 살던 중, 같은 동료였던 줄로가 탈출을 하는 과정에서 교도관을 살해하는데, 그 시체를 드가와 빠삐용이 옮기는 중, 마음이 약했던 드가는 갑자기 정신적 충격을 받아 교도관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상태가 되고, 이를 도우려던 빠삐용은 교도관을 돌로 때린 후 도망을 친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빠삐용은 붙잡히게 되고, 2년간의 독방 신세를 진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독방에 갇힌 빠삐용에 대해 고마움을 느낀 드가는 빠삐용에게 코코넛을 정기적으로 넣어주고, 이것을 먹으며 빠삐용은 독방에서 버티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소장은 빠삐용에게 식사를 절반으로 줄이고, 모든 햇빛도 차단한 채 24시간 어두운 감방에서 지내게 만든다. 소장은 누가 코코넛을 넣어 주었는지 말을 하면 고기가 들어간 수프를 주겠다고 하지만, 빠삐용은 절대로 드가의 이름을 대지 않는다. 드가는 이 일로 빠삐용을 신뢰하게 되고, 이후 드가는 빠삐용을 위해 그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도와주려고 노력한다.


  독방에서 나온 빠삐용은 다시 탈옥을 감행해 바닥에 구멍이 난 배로 폭풍우를 넘어 콜롬비아의 조그만 섬에 도착한다. 그곳은 천주교 신부들과 원주민들만 살고 있었다. 신부는 빠삐용에게 신을 믿고 회개하면 죄는 사라진다고 하지만, 빠삐용은 신부의 말을 믿지 않는다. 신부의 고발로 빠삐용은 다시 붙잡혀 5년 동안의 독방에서 지내게 되고, 이후 악마의 섬이라는 곳으로 보내진다. 그 섬은 어떤 누구도 탈출을 할 수 없는 파도가 거센 바다 한복판에 있는 섬이었다.


  악마의 섬에 도착해 보니 드가가 먼저 그곳에 와 있었다. 지난 탈옥으로 인해 드가는 악마의 섬에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는 형을 받았다. 드가는 자신의 아내가 감옥에서 꺼내 줄 것이라 믿고 있었지만, 드가의 아내는 젊은 남자와 불륜에 빠졌고, 이후 드가의 돈을 모두 자신의 것을 만든 후 그 젊은 남자와 살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드가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자신과 타협하여 악마의 섬에서 평생 살다가 죽을 생각으로 나름대로 집도 짓고, 조그만 농사와 가축까지 키우고 있었다.  


  악마의 섬은 바다 한가운데 있는 완전히 고립된 곳이었고, 사방이 모두 높은 절벽이기에 바다에 들어가려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또한 해류가 너무 자주 바뀌기에 감히 해류를 타고 악마의 섬을 벗어날 엄두를 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빠삐용은 매일 해류를 관찰하며 탈옥의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해류의 규칙성을 파악한 빠삐용은 자신 나름대로의 해법을 찾아낸 후 뗏목을 만든다. 드가에게 함께 탈출하자고 하지만, 드가는 이미 자기 아내는 자기를 버렸고, 탈출을 해도 갈 데도 없으며, 탈출이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고, 탈출을 하다 실패를 하면 사형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빠삐용과 함께 하지는 않는다.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빠삐용은 드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뗏목을 바다에 던진 후 조류를 타기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뗏목을 의지한 채 해류를 따라 악마의 섬에서 서서히 멀어져 가는 빠삐용을 드가는 절벽 위에서 바라보며 그의 탈옥이 성공되기를 기원한다.


  주인공인 빠삐용은 계속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왜 끊임없이 탈출을 했던 것일까? 독방 생활을 비롯해, 배고픔과 간수들의 폭행, 그 많은 고통과 괴로움으로 십수 년의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어 힘도 없고 몸도 따라주지 않는데도 무슨 이유로 8번의 탈옥을 시도했던 것일까? 친구처럼 그냥 적당히 타협하여 살아갈 수는 없었던 것일까?


  영화에서 빠삐용은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꿈에서 그는 사막 한가운데로 걸어가고 있었고, 저 멀리 맞은편에 재판관과 배심원이 앉아 있었다. 그는 평소처럼 결백을 주장하며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울부짖는다. 그러자 재판관은 “너에게는 분명히 죄가 있다. 네 죄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다. 그것은 인생을 낭비한 죄다”라고 말하며 유죄를 선고한다. 그토록 무죄임을 항변하던 그는 재판관의 말에 자신이 인생을 낭비해온 죄를 시인한다.


  그가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기에 그는 과거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건만, 자신의 게으름에 너무 많은 인생의 시간을 낭비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살인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감옥에 갇힌 채 자신의 인생을 또다시 낭비하게 된다면, 그는 과거의 잘못을 회복할 기회마저 잃게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았다.


  미래의 내가 의미가 없이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이라면, 현재의 나의 존재는 의미있는 것일까? 현재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더욱 나은 나의 미래를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빠삐용이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탈출을 시도한 것은 미래의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의 친구(더스틴 호프만)처럼 아예 감옥에서 생을 마감할 생각으로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오히려 더 편안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빠삐용은 그의 현재의 모습보다는 미래의 자신을 위한 길에 확신이 있었기에 그렇게 힘들어도 탈출을 계속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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