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나온 시간들 May 20. 2022

영영 이별 영 이별

조선 제6대 국왕 단종의 왕비였던 정순왕후 송씨는 조선의 왕비들 중 가장 한 많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싶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단종은 한국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국왕이었다. 11살에 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숙부인 세조에 의해 왕이 된 지 3년 만에 폐위되었고, 16살의 어린 나이에 사사된다.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이 죽고 홀로 64년을 살면서 역사의 한 많은 애환을 가슴에 아리며 살아가야만 했다. 


  김별아의 <영영 이별 영 이별>은 한 많은 정순왕후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의 나이 17살에 단종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이후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까지 6대 왕의 시대를 가슴에 한을 품은 채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이 권력의 폭압 속에 힘없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과 같이 애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녀는 증언하듯 말하고 있다. 


  “봄이면 등불처럼 피어나는 개나리가 산등성이 마루까지 부끄럽게 들추어 밝히는 응봉 자락, 당신과 내가 말만 좋은 상왕과 대비가 되어 잠시 머물렀던 옛 수강궁 자리에서 멀지 않은 이곳 정업원이 내게 주어진 지상의 마지막 거처였습니다. 태조대왕이 조선을 세우면서 지난 역사가 되어버린 고려의 마지막 수장인 공민왕의 후비 안씨가 집이면서 절이고, 집도 절도 아닌 이 슬픈 곳의 첫 번째 주지였다지요. 애초에 시작이 그러했던지라 이후로 정업원은 줄곧 사랑을 잃은 여인들의 한 서린 각시방이 되어버렸습니다. 안씨를 이어 주지가 된 심씨 역시 태종 임금이 왕자의 난리를 일으켰을 때 목숨을 잃은 방석대군의 안사람이었고요.” 


  정순왕후는 왕비에서 평민으로 추락한 후 날품팔이, 걸인, 비구니의 삶을 견디며 살아나갔다. 그녀의 마지막 거쳐였던 정업원은 한 많은 여인들이 살았던 거처였다. 그녀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자신의 마지막 거처였던 정업원에서 눈을 감을 때는 아마 그동안 흘린 눈물이 너무 많아 아무런 미련 없이 이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나는 중이었고, 뒷방 늙은이였고, 날품팔이꾼이었고, 걸인이기까지 했으나, 어찌 되었든 한때는 만백성의 어머니인 중전이 아니었던가요. 지금 와서 당신께 고백하지만, 미련하고 물정 어두운 아녀자의 몸으로도 나는 한순간 어지러운 세상사에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칠실지우라, 옛날 노나라의 천한 여자가 캄캄한 방에서 나랏일을 걱정했다는 고사처럼 분수에 맞지 않는 근심을 탓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출가 탈속하여 부처에게 귀의하는 시늉을 한 대도 끝내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내 손아귀에 끈끈하게 잡히는 것은 피, 내 눈시울을 휘적시는 것은 눈물, 내 입 안에서 침묵과 함께 삼켜지는 것이 한숨인 바에야, 굴레에서 벗어난 듯 해탈의 표정을 짓는 것이 도리어 거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순왕후는 그녀의 한 많은 삶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잊고 싶어도 그리할 수 없었고, 지우고 싶어도 그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너무나 가슴 깊이 커다란 상처로 새겨져 자신의 힘과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상황에서도 살아나갔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잃고도, 자신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사라졌어도, 삶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경험했어도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살아나갔다. 


  우리 모두는 각자 나름대로 삶에 대한 아픔과 불행의 시간이 있다. 하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나보다 더 많이 아프고 힘들게 살아갔던 사람도, 살아가는 사람도 너무나 많다. 어찌 생각해보면 그들의 삶보다 나의 삶은 그리 힘든 것이 아닐지 모른다. 어떤 어려움이 나에게 다가오더라도 나보다 더 커다란 불행 속에 있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나의 삶을 더욱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작가의 이전글 니모와 달팽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