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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May 31. 2022

개인은 시대의 희생물에 불과한 것인가?


  우리가 현존하는 시대는 개인적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한 명의 인간이 어느 시대에 태어나 살아가야 하는지는 그 사람의 선택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시대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 시대를 비켜 갈 수도 없다. 


  흔히 개인이 시대를 이끌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희망 사항일지도 모른다. 물론 개인의 힘이 모여 대중의 힘으로 어느 정도 시대를 바꾸어나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대가 개인을 압도하는 역사의 흐름에서 개인은 한낱 강물의 흐름에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떠내려가는 하나의 나뭇잎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조정래의 <황토>는 너무나 거센 시대에 태어나 저항 한 번 하지 못한 너무나 연약했던 개인 “점례”에 대한 가슴 아픈 소설이다. 


  “전쟁 뒷수습의 일환으로 나라에서는 가호적제를 실시했다. 전쟁 통에 분실된 서류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월남한 사람들을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점례도 시기를 놓치지 않고 가호적 신고를 했다. 당연히 호주는 남편 박항구였다. 그러나 피난 중에 행방불명되었다는 신고에 따라 사망자로 취급되었다. 큰아들은 신노스께나 김태순이 아니라 박태순이 되었다. 딸은 그대로 박세연이었고, 작은아들은 로버트에서 박동익으로 호적에 올랐다. 이때 점례는 자신의 나이가 스물일곱인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나이였다.”


  주인공인 점례가 낳은 자식은 모두 아빠가 다르다. 첫째 아들의 아버지는 일본군 순사 주임이었다. 점례의 아버지가 과수원에서 일하던 중 과수원 주인은 일본인이었다. 그 과수원 주인이 대낮에 점례의 어머니를 겁탈하는 것을 본 점례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내가 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해 주먹을 휘두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일본인이었던 과수원 주인은 상해를 당했다. 점례에게 눈독을 들이던 일본 순사는 점례를 자신의 첩으로 하는 조건으로 점례의 부모를 풀어주었다. 하지만 일제가 패망한 후 일본 순사는 자신의 자식과 점례를 버리고 일본으로 도망가 버리고 만다. 


  “아들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시집을 간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처녀로 속이자는 말이 아닌가. 그럼 아들과는 생이별을 하는 것이다. 평생을 속여야 할 것이니 호적은 어디다 올릴 것인가. 어쩔 수 없이 막내동생 뒤에 붙게 될 것이다. 그럼 성은 김가가 되고, 아들이 동생으로 둔갑하게 된다. 못 할 짓이다. 시집을 가서 무슨 영화를 보자고 그런 모진 짓을 하라는 것인가. 처녀로 속여 시집을 가서 평생을 가슴 조이고, 자식과는 생이별을 하여 삭힐 길 없는 한을 심는다. 거기다가 자식을 동생으로 만들어야 하는 짓까지 해가며 이중 삼중의 죄를 짓느니보다는 기왕 망쳐진 신세 돈 많은 사람의 첩이 되는 게 오히려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첩살이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이며, 그렇게 살아서 무엇한단 말인가. 차라리 죽어버리자. 저것을 끌어안고 죽어버리자. 어차피 잘못되고 망쳐진 팔자였다. 죽어버리면 그보다 더 말끔하고 간단한 해결책은 없을 거였다. 이 세상을 떠나버리면 저 어린 것은 애비 없는 자식으로 괄시를 안 받아도 되고, 식모 아들로 천덕꾸러기가 안 되어도 되고, 평생 에미 떨어져 살며 에미와 형제가 안 되어도 되는 게 아닌가.”


  19살의 나이에 일본 자식까지 둔 점례를 본 어머니와 큰이모는 점례를 북한에서 부모를 잃고 남하한 한국인 남자에게 시집을 보낸다. 점례와 일본 순사 사이에 낳은 자식은 점례의 어머니가 낳은 것으로 해서 김태순으로 이름을 바꾸고 점례의 어머니가 키우기로 한다. 


  점례는 박항구 사이에 딸 둘을 낳는다. 하지만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박항구는 인민군 간부가 되어 점례와 아이들만 남겨 놓은 채 북으로 넘어간다. 


  “항아리를 눕혀 딸의 시신을 넣으며 점례는 더는 울지 않았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자식을 지켜내기에는 전쟁의 물결이 너무나 거세고 무정했다. 항아리가 실히 한 길이 넘는 구덩이에 내려졌다. 점례는 흙을 항아리 위에 뿌렸다. 점점이 떨어지는 붉은 황토 위에 남편의 얼굴이 어리고 있었다. 얘들 잘 키워 열두 폭 병풍 해서 시집보내 줘야지. 남편이 배냇짓을 하는 작은딸의 눈을 들여다보며 한 말이었다. 흙이 구덩이를 다 채워 파내기 전의 높이가 될 때까지 점례는 세 번이나 삽질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흙을 꼭꼭 밟아 다졌다. 아무리 깊게 팠어도 단단하게 다지지 않으면 위태로운 일이었다. 여우라는 놈은. 백여우는. 점례는 전신의 힘을 발에 모아 힘껏 흙을 다졌다.”


  남편이 인민군 간부였기에 점례는 국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미군에 넘겨지게 된다. 인민군 간부와 연관 있는 사람은 미군이 철저히 조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과정에서 점례는 둘째 딸을 잃는다. 


  조사를 받던 과정 미군 대위 로버트 프랜더스는 점례에 호감을 갖고 자신이 스스로 점례의 보증인이 되어 그녀를 풀어 준다. 점례가 당분간 머무를 곳을 마련해 주고 자신의 집안일을 맡긴다. 하지만 점례는 로버트에게 겁탈을 당하고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그래서 낳은 자식이 막내 동익이였다. 로버트는 자신의 자식을 낳은 점례와 함께 살기 시작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에서 밀리기 시작한다. 


  “20여 일이 지났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수소문을 했다. 프랜더스는 전방 출장을 간 것이 아니었다. 본국으로, 태평양을 건너가 버린 것이었다. 너무 허망하게 떠나버린 사람이었다. 점례는 눈이 파란 어린 것을 안고 그저 쓸쓸하게 웃었다. 원망이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가기로 작정 되어 있었던 사람이었다. 슬플 이유도 없었다.”


  로버트는 미국에 자신의 아내와 두 아이마저 있었던 남자였다. 타국땅에서 정욕을 참지 못해 점례를 상대로 자신의 본능을 채우기만 한 것이었다. 


  “점례는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았다. 이제 자신은 세 아이의 어머니였다. 프랜더스가 영영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듯 남쪽이 전쟁에 지지 않는 한 남편도 돌아올 가망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은 혼자였고, 세 자식을 길러내야 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앞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 중한 현실만 똑바로 바라보며 정신을 차리고자 했다. 자신의 팔자가 기구하다거나 신세가 박복하다는 비탄이나 탄식에 빠지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피하려야 피할 수 없어서 당하게 된 일이었다.”


  점례의 자식을 낳게 한 사람들은 일본인, 공산주의 한국인, 그리고 미국인이었다. 그동안 이 땅의 주인 행세를 해왔던, 자신의 권력을 절대적으로 휘둘렀던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한반도의 지형을 만드는 데 앞장섰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점례와 자신들의 자식마저 버리고 모두 떠나버렸다. 주인 행세를 할 자격도 없는 이들이었기에 피붙이도 아랑곳없이 가족이라는 개념도 없이 잠시 왔다가 간 주인이 아닌 나그네였을 뿐이다. 


  “험하고 고달프게 살아온 세월이었다. 남은 것이라곤 세 자식뿐이었다.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허둥지둥하며 한시도 편할 때 없이 억척스럽게 살아왔다. 자식들이 잘되는 것만이 소원이었고, 그것이 유일하게 잡고 있었던 삶의 끈이었다. 그런데 자식들이 커갈수록 그 바람은 빗나가는 것만 같았다. 모두 하나로 뭉쳐서 서로 의지가 되고 힘이 되어 살기를 소원했다. 그러나 그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바람이 자꾸만 엇나가고 버그러지고 있었다. 세 자식을 위해 몸 바스러지게 최선을 다했던 것은 무슨 덕을 보자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세 자식이 오순도순 사이좋게 살기를 바랐다. 그것이 눈물뿐인 자신의 인생을 보상받는 유일한 길이라 여겼던 것이다.”


  힘으로 돈으로 사랑으로 점례의 주인 행세를 했던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점례 옆에서 있었던 그들은 모두 떠나버렸다. 홀로 자식만 바라보고 평생을 살아왔건만, 아빠가 다른 자식들 또한 함께 살아가기가 힘든 것일까? 그나마 그 자식들을 바라보고 버티어 왔지만 이제 점례가 디디고 서 있던 자식이라는 땅마저도 흔들리고 있음을 점례는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삶은 어디서 보상받아야 하는 것일까? 거센 시대의 흐름에 개인은 그렇게도 약한 존재에 불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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