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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Jun 06. 2022

젊은 느티나무

사랑은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 것일까? 그 시작점도 모르고 그 종착점이 어딘지 모른 채 우리는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는 숙희와 현규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랑이 시작되었고, 그 종착지가 어딘지를 모른 채 두려워하며, 자신들이 바라는 곳에서 그 사랑이 끝나기를 희망하는 이야기이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사랑하지 않고 이런 표현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도 마음 전부를 다해 좋아했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시작부터 미완성을 향해 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루해와 하룻밤 사이, 바위를 씻는 파도 소리같이, 가슴에 와 부딪고 또 부딪고 하던 이 한 가지 상념에 나는 일순 전신을 불살라본다. 그러나 매일 되풀이하며 애를 쓰지만 나는 역시 알 수가 없다. 그의 눈의 의미를 헤아릴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괴롬과 슬픔은 좀 더 무거운 것으로 변하면서 가슴속으로 가라앉아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찰나에는 나는 그만 자연스러운 위치-그의 누이동생이라는 표면으로 보아 아무 스스러움도 불안정함도 없는 나의 위치로 돌아가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깨닫는다.”


  그의 마음을 알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같은 마음이기를 희망하지만, 어떠한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기에 마음 그 뒤로 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아무도 모르게 일상의 위치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이곳에는 뜻하지 않은 괴로움이 또한 있었다 현규에 대한 감정은 언제나 내 맘을 무겁게 하고 있다. 너무나 고통스럽게 여겨질 때에는 여기 오지를 말았더면 하고 혼자 중얼대는 일도 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는 않는다. 나는 만약 내 생애에서 한 번도 그를 만나는 일이 없이 죽고 말 경우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가슴이 서늘해지기까지 한다.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아도 좋았다. 나는 그를 만났다는 일만으로 세상의 어느 여자보다도 행복한 것이다. 그의 곁에서 호흡하고 있는 기쁨을 무엇으로 바꿀 수 있을까.”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내면적 괴로움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어쩌면 아픔의 시작이고, 기쁨은 슬픔의 또 다른 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헤아려 보아도 만났다는 그 행복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범벅이 된 혼란 상태에서 자기를 건져내야 한다고 그 어두운 강물을 바라보며 늘 생각하는 것이었다. 마음 가는 대로 몸을 내맡길 수 없는 것이 나의 입장이고 또 마음 가는 일 자체에 대해서는 분열된 생각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현규를 사랑한다는 일 가운데 죄의식은 없었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엄마와 무슈 리를 그런 의미에서 배반하는 것은 곧 네 사람 전부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파멸이라는 말의 캄캄하고 무서운 음향 앞에 나는 떨었다.”


  마음이 닿는 대로 하다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두려웠다. 법적으로 윤리적으로 둘러싸인 사회적 벽이 너무나 높다는 현실은 어쩌면 좌절을 시작부터 예고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에게 좋게 되는 길이 전혀 예상되지 않는 상황에서 사랑의 힘은 너무나 미약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무슈 리와 엄마는 부부이다. 내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기 어려운 것은 거의 그런 말을 발음해본 적이 없는 습관의 탓이 크다. 나는 그를 좋아할뿐더러 할아버지 같은 이로부터 느끼던 것의 몇 갑절이나 강한 보호 감정-부친다움 같은 것도 느끼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의 혈족은 아니다. 현규와도 마찬가지다. 그와 나는 그런 의미에서는 순전한 타인이다. 스물두 살의 남성이고 열여덟 살의 계집아이라는 것이 진실의 전부이다. 왜 나는 이 일을 그대로 알아서는 안 되는가. 나는 그를 영원히 아무에게도 주기 싫다. 그리고 나 자신을 다른 누구에게 바치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우리를 비끄러매는 형식이 결코 오누이라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또 물론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같은 일을 생각하고 있기를 바란다. 같은 일을-같은 즐거움일 수는 없으나 같은 이 괴롬을.”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사랑에 대한 희망을 놓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다. 그것은 욕심일 수밖에는 없지만, 그 욕심마저 없다는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도 있기에 내려놓기가 힘든 그런 욕심이었다. 그 또한 자신과 같기를 소망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그만큼 그를 사랑하기 때문인 것일까?


  “전류 같은 것이 내 몸속을 달렸다. 나는 깨달았다. 현규가 그처럼 자기를 잃은 까닭을. 부풀어 오르는 기쁨으로 내 가슴은 금방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침대 위에 몸을 내던졌다. 그리고 새우처럼 팔다리를 꼬부려 붙였다. 소리 내며 흐르는 환희의 분류가 내 몸속에서 조금도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현규 또한 숙희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삶의 환희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의 순간은 삶에 있어서 느껴볼 수 있는 살아있음 그 전부이기에 너무나도 소중했다. 그리고 마음 깊은 속에서 간절히 희망했다. 그것이 오래갈 수 있도록.


  “바람이 마주 불었다. 나는 젊은 느티나무를 안고 웃고 있었다. 펑 울면서 온 하늘로 퍼져가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었다.”


  젊은 느티나무 사이에서 부는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희망의 바람이었고 기쁨의 바람이었다. 그 바람이 그녀에게 살아가고 싶다는 의지를 가져다주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는 희망은 그렇게 온 하늘로 퍼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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