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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Jun 11. 2022

에우로파

 소중한 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 믿는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그런 비슷한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하더라도, 그러한 일은 다분히 일어나곤 한다. 우리는 그런 커다란 상처가 있어도 살아가야 한다. 모든 것을 잃어서 삶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전혀 모른다 해도, 우리는 살아가야만 한다. 한강의 소설 <에우로파>는 어떤 상처를 안고서라도 살아가고 있는 인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잊을 수 없는 여름밤의 한순간이었다. 인아의 노래가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청춘의 한 복판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순간 인아를 사랑하게 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인아의 노래가 갑자기 끝났을 때,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억눌러왔던 생생한 갈망이 단박에 빗장을 끄르고 내 심장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을, 그 어둡고 남루한 골목 한가운데서 나를 마주 보며 서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어떤 한순간이 다가왔다. 인아라는 이름이 이제는 확실한 존재가 되어 그렇게 다가왔다. 그 존재로 인해 자신의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어떤 한 존재는 다른 한 존재에게 영향을 주곤 한다. 소중한 존재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왜 더 살아야 하는지 설득해봐,라고 인아가 나에게 말했었다. 그러니까, 내가 더 살아 있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망설이는 나의 대답을 더 기다리지 않고 인아는 말했다. (나한테는 근본적으로 위대함이 결핍돼 있어. 이 얘기도 언젠가 했어. 기억해?) 기억했지만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거울에서 몸을 돌려 돌아보자, 인아의 담담한 눈길이 내 얼굴을 찬찬히 응시했다. (내 안에서 가볼 수 있는 데까지 다 가봤어.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어. 그걸 깨달은 순간 장례식이 끝났다는 걸 알았어. 더 이상 장례식을 치르듯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어. 물론 난 여전히 사람을 믿지 않고 이 세계를 믿지 않아. 하지만 나 자신을 믿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그런 환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더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 걸까? 지나간 시간이 그리 의미 있었던 것도 아닌 것 같고, 앞으로 남은 시간도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은데, 무엇을 바라고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가볼 때까지 다 가봤는데, 더 이상 새로운 것도 없을 텐데,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이 세상에서 계속 존재자로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아주 오래전, 그녀가 위태롭게 어두웠을 때, 단 하룻밤의 몇 시간 동안 허락된 일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일을 겪은 뒤에도 우리가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것이 환영처럼 잠시 이뤄지거나 단박에 파괴된 뒤에도, 검은 바다의 밑면 같은 거리를 한 걸음씩 못을 치며 나아가는 일만 남는 것을 알고 있다. 나 역시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고통을 주는 데가 있는 인아의 웃음을 보며 생각한다. 언젠가 그녀가 나를, 내가 그녀를 깊게 상처 입히리란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산책이 영원하지 않으리란 것을 안다.”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는 것을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차피 내가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한테 아픔을 주기고 하고, 나 또한 그로부터 고통을 받기도 한다. 그런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겁이 나서 그를 버리거나 내가 떠난다고 한다면 영원히 치유되지 못하는 상처로 남게 될 뿐이다.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암석 대신 얼음으로 덮인 달  

   

  지구의 달처럼 하얗지만

  지구의 달처럼

  흉터가 패지 않은 달     


  아무리 커다란 운석이 부딪친 자리도

  얼음이 녹으며 차올라

  거짓말처럼 다시 둥글어지는,. 

  거대한 유리알같이 매끄러워지는”     


  목성의 위성, 에우로파처럼 우리의 삶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것을 포용하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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