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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Jun 13. 2022

시간이란 무엇일까?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 <자연학>에서 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간은 운동의 전후에서의 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이라는 것은 사물의 변화를 말하고, 그 변화의 수가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즉 그에게 있어 시간이란 운동이나 변화가 일어나야 인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기원전 5세기 제논은 소위 날아가는 화살의 패러독스에 대해 말한다. 즉 “날아가는 화살은 일순간 정지해 있다. 정지하고 있는 화살을 아무리 모아도 화살은 날아가지 못한다.” 제논은 화살이 날아가는 운동 자체를 부정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에서 화살은 날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은 어딘지 결함이 존재한다. 그의 주장에 있어 ‘일순간’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일순간을 시간을 무한으로 짧게 자른 경우 그 하나를 일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무한으로 짧게 자른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이러한 문제는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논의가 되고 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인류는 되풀이 되는 천체의 움직이나 자연의 현상으로 인해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면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고, 그 해는 하늘에서 움직이다가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지게 된다. 이렇듯 태양의 움직임으로 우리는 ‘하루’라는 시간적 개념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었다. 밤에 뜨는 달의 모습을 보면 매일 다르게 나타난다.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그리고 그믐달이 되는 동안 30일 정도가 지나게 되고 우리는 그것으로 한 달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되었다. 봄이 되어 꽃이 피고 더운 여름이 지나 단풍이 드는 가을이 된 후 하얀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이 지나면 다시 꽃피는 봄이 되는 것으로 일 년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 인류는 천체의 움직임과 자연의 현상으로 시간의 개념을 확실히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기계인 시계라는 것을 만들게 된다. 


  태양은 지고 나면 다시 떠오르고, 보름달은 1개월 후 다시 제 모습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천체의 운행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천체의 운행을 시간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시간은 순환하는 것이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인 시리우스가 새벽이 되기 바로 직전 동쪽 지평선에서 올라올 때를 1년의 시작으로 정했다. 이것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집트 사람들에게 있어 계절을 정확히 안다는 것은 홍수가 되는 시기인 나일강이 범람하는 것을 예측하거나, 농사를 짓기 위해 씨를 뿌리는 시기를 정해야 했던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하루를 낮과 밤으로 나누고, 각각 12개로 구별하여 1시간이라는 길이를 정했다. 그들의 생활의 편리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낮과 밤의 길이는 달랐다. 여름의 경우 낮의 길이는 길고, 겨울의 경우에는 밤의 길이가 길었다. 즉 그들에게 있어 낮의 길이는 여름이 훨씬 길기 때문에, 겨울의 1시간보다 여름의 1시간이 더 길었다. 이집트인들에게 있어 1시간은 현대 우리들의 1시간과 같이 절대적인 개념이 아닌 계절에 따라 그 길이가 변하는 것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러한 상대적 길이의 1시간이 보다 정확한 절대적인 시간으로 정해져갔다. 시간을 측정하기 위한 기계인 시계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게 된다. 중세까지 시계는 부정확한 해시계나 물시계가 전부였다. 매일 똑같은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바로 이탈리아의 갈릴레이였다. 뉴턴이전 역학의 체계는 바로 갈릴레이에 의해 성립된다. 


  갈릴레이는 어느 날 피사의 성당에서 예배를 보다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의 움직임을 보고 그 흔들림이 클 때의 왕복시간과 흔들림이 작을 때의 왕복시간이 같다는 것을 자신의 맥박을 측정하며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진자의 주기는 그 질량과 진폭에 무관하다”는 진자의 등시성이었는데 그가 처음으로 이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 성질은 시간의 절대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네덜란드의 호이겐스는 시계추라는 것을 발명하여 소위 정확한 ‘진자시계’를 만들어내게 된다. 이로 인해 인류는 시간을 천체의 운행이나 자연의 변화와 상관없이 아주 정확한 간격을 가진 시계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진자시계가 인류에게 보급됨으로써 시간이라는 것은 측정할 때마다 변하는 것이 아닌 항상 일정한 길이를 가진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후로 사람들은 보다 정확한 시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호이겐스가 만든 진자시계는 오차가 하루에 10초 정도였는데, 그 전의 시계에 비하면 상당히 정확한 것이었다. 진자시계의 등장은 우리에게 시간을 더 세밀히 쪼깬 ‘분’이나 ‘초’라는 개념의 등장으로 이어졌고, 1927년에 이르러 소위 ‘수정시계’가 발명되었다. 이것은 수정의 얇은 판에 전압을 걸 때 일어나는 규칙적인 진동을 진자대신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 오차는 1개월에 약 15초 정도였다. 1955년에는 ‘세슘 원자시계’가 발명되었는데 이는 세슘 원자의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특정한 전파의 진동을 진자나 수정 대신 이용하였다. 현재의 ‘1초’의 정의는 이 원자시계의 1초에 바탕을 둔다. 최신의 원자시계는 그 정확도가 3,000만년에 1초 정도이다. 이것보다 더 높은 정확도를 가진 시계는 우주 공간에 있는 ‘펄사’이다. 펄사는 극도로 규칙적으로 점멸하는 천체인데 그 오차는 1억년에 1초 정도 된다. 


  갈릴레이가 죽던 해 태어난 뉴턴에 의해 인류는 역사적인 과학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그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지극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인물이다. 우주 공간의 모든 물체는 운동하고 있고 그러한 운동을 이해하는 것이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것을 생각했던 뉴턴은 그 운동의 측정을 위해서는 절대적인 기준이 필요했다. 그에게 있어 그 기준은 바로 시간이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책이라 불리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절대시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했고, 이후 인류는 그의 이러한 패러다임에 속박되고 만다. 뉴턴의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절대적인, 참된 수학적인 시간은 그 스스로 그것의 본성으로부터 외계의 어느 것과도 무관하게 균일하게 흐르는데 이것에 대한 다른 이름을 지속이라고 한다.”


  인류의 위대한 과학자 뉴턴의 아이디어 의해 우리는 이 절대적인 시간이라는 개념에 갇혀버리고 만다. 그가 생각한 절대 시간이란 물체가 있든 없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오직 전적으로 일정한 템포로 흐르는 것이 것이었다. 우주에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가 하나도 없다고 하더라도 뉴턴은 시간은 여전히 흐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시계뿐만 아니라 모든 물질이 완전히 없어져 오직 공간만이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은 계속 흐르는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이러한 뉴턴의 생각에 반기를 든 사람도 있다. 독일의 라이프니츠는 “시간이란 복수의 사물의 순서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사물과는 상관없이 흐르는 절대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뉴턴의 엄청난 업적에 밀려 가려지게 되고 만다. 이후 인류는 근대과학의 발전과 함께 시간에 대한 절대성이라는 개념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뉴턴의 생각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되어갔으며 이후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상식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뉴턴의 절대시간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약 250년이 지난 후 스위스 베른에 있는 특허사무국 직원으로 일하던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1905년 그리 알려지지 않은 학술지에 논문 하나를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당시 지구 위 모든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던 시간이라는 개념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그는 논문에서 “운동하는 시계의 진행은 느려진다. 운동의 속도가 빛의 빠르기에 접근하면 시간의 지연은 강해지고, 빛의 빠르기에 도달하면 시간은 멈춘다.”라는 당시 상식하고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한다. 이 논문이 처음 나왔을 때 당시 이 주장에 관심을 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250년 동안 인류의 사고를 지배해 왔던 뉴턴의 패러다임은 이 논문으로 무너지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모든 것이 같은 시간을 기록한다는 뉴턴의 절대시간을 철저히 부정했다. 이로 인해 인류에게 있어 시간이라는 개념은 혁명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해 계산을 해보면 시속 200km로 달리는 고속 열차의 시계는 기차역에 정지해 있는 시계에 비해 1초당 100조분의 2초가량 늦어진다. 시속 1,000km로 날아가는 비행기의 경우에는 1초당 100조분의 1초 정도 늦어진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론을 발전시켜 1915년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하였는데 일반상대론에 의하면 시간은 운동하는 관찰자뿐만 아니라 중력에 의해서도 느려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예를 들어 지구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중력은 약해진다. 지구에서 가장 높은 해발 8,848m인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서는 바다표면인 해발 0m에 놓인 시계에 비해 100년당 300분의 1초가량 빨리 가는 것으로 계산된다. 


  이렇듯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뉴턴이 지배하던 절대시공간의 개념에 혁명을 가져다주었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류는 뉴턴의 패러다임이 아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바탕을 둔 패러다임 속에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주의 개념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미래에 또 다시 시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나올지 알 수는 없다. 


  시간에는 뉴턴의 절대주의 역학체계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와 밀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태양계 밖에서 발견된 알지 못하는 행성의 공전운동을 기록한 영화를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이 행성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알고 있지 못하며, 만약 이 영화필름이 중간위치에 감겨진 상태로 놓여있다고 할 때 이 영화의 재생 방향을 모를 경우 어떻게 될까?


  이 영화필름을 어느 한쪽 방향으로 재생하면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행성의 영상이 나오고, 다른 쪽 방향으로 재생하면 왼쪽으로 회전하는 행성의 영상이 나온다고 하자. 어느 쪽 방향으로 필름을 돌려도 어떤 부자연스러움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어느 쪽이 과거이고 어느 쪽이 미래인 것일까? 


  뉴턴의 역학은 시간의 어느 쪽이 과거이고, 어느 쪽이 미래인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과거나 미래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나의 아버지는 영원히 나의 아버지일 뿐 나의 아들이 되지는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어떤 물리 법칙이 시간의 방향을 알려주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주의 시작과 진화와 관계되는 법칙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과거와 미래를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원래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 과거가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깨진 컵은 다시 되돌아가지 못한다. 기울어진 경사면을 굴러가다가 편평한 바닥에 이르러 어느 정도 가다 멈춘 공이 다시 방향을 반대로 바꾸어 경사면을 거꾸로 올라가지는 않는다. 우리들 또한 시간과 더불어 늙어갈 뿐,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젊어져 아기가 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시간적으로 역전할 수 없는 과정을 ‘비가역과정’이라고 한다. 우리가 과거와 미래를 구별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비가역과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가역과정으로 인해 우리는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생각한다. 이를 영국의 물리학자 에딩턴은 시간의 방향성을 소위 ‘시간의 화살’이라고 표현했다. 뉴턴의 역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는 시간에는 정해진 방향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시간의 화살이 일어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시간의 화살을 가져다주는 이러한 비가역진인 변화가 생기는 원리는 바로 수많은 원자나 분자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는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이 연구하였다. 볼츠만은 그 당시에는 증명되어 있지 않은 원자의 존재를 믿고 비가역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원인을 탐구했다. 그는 원자들의 분산 상태를 시간의 개념과 더불어 고민했다. 볼츠만은 원자들의 분산 상태를 수학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엔트로피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입자의 배치가 고르게 되어 있다면 엔트로피가 낮다고 하였고, 입자의 배치가 분산되어 있다면 엔트로피가 높다고 계산하였다. 예를 들어 처음에 커피만 있는 잔에 우유가 섞이게 된다면, 섞이지 않은 우유의 경우 엔트로피가 낮고, 우유에 커피가 섞인 이후에는 엔트로피가 높아진다. 커피가 우유에 섞인 이후 다시 우유에서 커피가 섞이게 되지 않은 상태로는 돌아올 수 없다. 즉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에서 낮은 상태로 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주의 생성과 진화는 바로 이러한 엔트로피와 관계된다. 우주는 엔트로피가 점점 증가하는 상태로 변해갈 뿐이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 또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소위 ‘시간의 화살’의 원인은 바로 이 엔트로피 증가원리에 따른다. 우주 공간에 있어 시간은 이렇듯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에서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무엇일까? 살펴본 바와 같이 시간의 개념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과학이 발전하면서 어떠한 새로운 개념의 시간이 나올지 알 수도 없다. 우리는 현재 있는 이 위치에서 시간에 대해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시간에 대한 정확한 답은 인류의 한계밖에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세계는 우리 인류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일 수밖에 없으며 완전한 답을 찾고자 함은 그 열정에서 멈추어야 할뿐 이 그 이상은 욕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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