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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Jun 14. 2022

알파의 시간

 우리의 삶은 부분 시간의 집합체가 아닐까? 그 부분적인 시간은 각각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고, 오래도록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시간도 있고, 계속되기를 바라지만 결국 끝나버리고 마는 시간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우리의 인생은 그런 모든 시간의 총합일 수밖에 없다. 


  하성란의 <알파의 시간>은 엄마의 삶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적 시간이 있었지만, 그 시간 또한 엄마의 인생을 위해 필요했던 시간, 즉 알파의 시간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엄마의 기억은 크리스마스트리의 점등 장식처럼 수시로 점멸했다. 엄마는 막내 건희 아빠만 집 안에 들어서면 배시시 웃었다. 몸을 배배 꼬고 콧소리도 냈다. 대지의 심장 소리를 들어라. 러시아 시의 시구 같은 문장을 읊어대다가도 별안간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치며 울었다. ‘여기로 알아달라구, 여기로.’ 엄마는 먹는 시늉만 하고 뱉어낸 약을 싼 티슈나 코를 풀고 가래를 뱉은 티슈를 돌돌 뭉쳐 매트리스 밑이나 베개 밑에 숨겨두었다. 여기저기를 들춰가며 티슈 뭉치를 찾아내던 막내가 날 불러 세웠다. ‘누나, 엄마가 아까부터 뭐라 중얼거리는데 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 뭐라는 거야?”


  인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엄마, 엄마는 치매를 앓고 있기에 이 세상에서 보내야 할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엄마의 인생에서 수많은 시간이 있었지만, 그 굴곡진 시간을 거쳐 여기에 이른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어떤 시간을 거쳐 엄마는 여기까지 왔던 것일까? 


  “엄마의 가게는 좀처럼 매상이 오르지 않았다. 똑같은 곳에서 대주니 그 맛이 그 맛일 텐데도 사람들은 엄마네 가게를 지나쳐 다른 가게로 갔다. 단골이 생길 때를 기다려야 했다. 밤이 되면 엄마는 팔리지 않은 순대와 간, 어패류가 든 스뎅 다라이를 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뚱뚱한데다 커다란 다라이까지 인 엄마가 폭 좁은 철제 계단을 밟아 옥상에 올라올 때면 간이 졸았다. 한창 크는 애들 넷이 먹어 치우기에도 적잖은 양이 늘 남았다. 우리가 잠든 뒤에도 엄마는 한참 부엌에서 서성거렸다. 소금을 넣어 꼬막을 닦고 설탕을 넣어 간장에 조렸다.”


  남편의 파산으로 인해 모든 재산은 날아가고, 집 나간 남편은 언제 돌아올지 모른 채 엄마는 네 명의 자식을 혼자 키워가야만 했다. 시장 한복판에서 아무런 경험 없이 시작한 가게는 결코 쉽지 않았고, 너무나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런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야만 하는 것일까? 기다리고 버텨야 하는 시간, 즉 알파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한 여자가 달려들어 엄마의 다리에 발을 걸었다. 한참 용을 쓴 뒤에야 수령 많은 나무가 쓰러지듯 엄마가 우지끈 넘어졌다. 여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엄마는 여자들에게 뭇매를 맞았다. 주먹이 쏟아질 때마다 큰 덩치가 움찔움찔했다. 누가 어름집 여자인지 알 수 없었다. 한 여자가 엄마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아 흔들었다. 엄마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엄마는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 나는 맞은편 건어물 가게의 차양 아래서 이 광경을 보던 쌍둥이 중의 하나가 몸을 휙 돌려 시장 골목을 뛰쳐나가는 것을 보았다. 어제 돌아오지 않은 쌍둥이인지 새벽녘까지 엄마를 기다리던 쌍둥이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나는 끝까지 엄마를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해 봄에서 여름까지의 오 개월이 내게는 발 하나짜리 돼지의 공포였지만 엄마에게는 붉고 푸르던 고명의 시절이었을까, 아직까지 나는 머리로만 이해할 뿐이었다.”


  집 나간 남편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고, 혼자 지내야만 했던 엄마는 많이 외로웠을 것이다. 주위에 남자들은 많았고,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기에는 쉽지 않은 세상이었다. 결국 남편 없는 외로움을 참지 못한 채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 대가 또한 너무나 클 수밖에 없었다. 엄마에게 있어 이런 말하지 못할 아픈 시간의 존재는 불가항력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풍경을 응시했다. 이제 간판의 계집아이가 나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세잔의 생트빅투아르 산이 세잔을 보듯 나의 간판이 나를 보고 있었다. 허만하 시인은 한 산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잔이 그 풍경을 받아들일 눈을 가지는 데에는 그때까지의 유럽 미술사의 모든 시간 플러스 알파가 필요했다고. 그 알파란 세잔이 시대보다도 앞질러 달렸던 바로 그만큼의 시간이 아니겠냐고. 그렇다면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간판을 볼 수 있기까지 나에게도 나만의 알파의 시간이 흘러갔다는 생각이 든다. 한참을 돌고 돌아 그 간판 앞에 서기까지 그 알파의 시간이 좀 길었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내 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응시했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종류의 부분적 시간으로 인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 시간이 어떤 형태건 그 사람의 삶 자체이기에 그 시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삶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받아들일 수는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에게는 그 나름대로의 알파의 시간은 있기 마련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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