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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Jun 22. 2022

단 하루의 영원한 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하루가 모두 다 똑같은 하루는 아니다. 보통 70~80년을 사는 우리의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평생을 따라다니는 그런 하루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 하루가 우리에게 커다란 멍에가 되기도 하고, 큰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되기도 한다. 


  김인숙의 <단 하루의 영원한 밤>은 어떤 한 제자와 교수가 함께 여행을 간 단 하루의 일이 그들에게 평생을 따라다니는 영원한 하루가 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이다. 


  “정신이 혼미해진 이후로 선생의 30년 전 기억은 20년 전이 되었다가 10년 전이 되었다가 혹은 어제가 되기도 하고 오늘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억의 내용만큼은 한결같았는데, 그것은 선생의 몸이 최후의 생존을 위해 남겨놓을 수 있는 것만 남겨놓은 것처럼 건조하거나 순정했다. 혹은, 그래서 야비하기도 했다. 30년 전, 기차역 앞의 여관방에 선생은 혼자 머물렀던 것이 아니었다. 그날 해안 도시의 대학까지 선생과 동행하기 위해 기차를 탔던 제자와 함께였고, 제자는 그 후 선생의 아이를 낳았다. 정신이 혼미해지기 전에도, 그 후로도 선생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선생이 말하지 않았으나 소문이 사실보다 더 구체적으로 퍼져 그 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는 치매에 걸려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교수, 그에게는 오래전 제자와 함께 단 하루 여행을 했었던 적이 있었다. 가정이 있는 교수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제자가 여행을 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이유는 어찌 됐든 간에, 그들이 서로 마음을 주고받았든지 간에, 서로 남자와 여자로서 사랑했었든 간에, 그들이 함께 밤을 지낸 시간은 단 하루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하루는 일상의 평범한 하루하고는 완전히 다른 하루였다. 


  “30년 전, 부당하기 짝이 없던 세월에 사생아를 낳았던 여자는, 그리고 그 아이를 30년 동안 홀로 키웠던 여자는 그걸 알았을 것이다. 세상은, 삶은, 거친 항해를 해가며 파도와 싸우는 것도 아니고, 손바닥에 피를 흘리고 무릎이 까지며 높은 암벽을 등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삼키는 것이다. 겉보리로 지은 거친 밥을 찬물 한 사발도 없이 꾹꾹 눌러 삼키듯, 그렇게. 방귀를 뿡뿡 꿔가며. 그러니까 냄새를 풀풀 풍기며, 생을 뒤틀어놓은 어느 날부터가 아니라 생이 존재하기 시작한 그날부터.”


  교수가 자신의 아이를 위해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여인은 왜 혼자서만 아이를 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단 하루에 일어났던 사건이 평생을 그들의 굴레가 되어버리고 말았거늘, 왜 서로 그 굴레를 풀어보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을 준비된 죽음이라 말하든, 준비된 삶이라 말하든 다를 것은 없었다. 자신의 생에 가장 엄숙한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 아니라 죽음을 예견하는 그 순간일지도 몰랐다. 그 순간이 어느 결정적인 찰나에 오리라는 것은 없었다. 그것은 그저 누구도 알 수 없는 순간인 것이다. 오십의 나이에 유서를 쓰지는 않았으나 오십을 넘겨 M을 낳았던 선생의 그 어느 순간처럼.”


  죽음이 우리 자신에게도 예외 없이 다가오고 이제 그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음을 알게 된 순간, 우리의 삶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깨닫게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동안 어떠한 하루들을 보내며 살아왔던 것일까? 우리가 보낸 그 하루가 영원히 나와 함께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했던 그 어떤 하루가 어쩌면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그림자가 되어 나의 삶 전체를 붙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런 영원히 계속되는 하루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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