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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Jun 24. 2022

삶에도 재생력이 있다면

 삶은 수많은 사건들의 집합이다. 그중 어떤 사건은 우리 삶은 완전히 바꾸어 놓기도 한다. 그로 인해 사람은 변하고, 사랑도 변하며 인간관계도 변한다. 


  우리의 삶에 재생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힘들었던 인간 관계도 쉽게 회복할 수 있고, 무관심으로 변해가는 사랑도 회복될 수 있다면 삶이 좀 더 쉬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도마뱀이나 도롱뇽의 재생력처럼. 한강의 <노랑무늬영원>은 재생되지 않는 우리 삶에 대한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이다. 


  “난 언제나 그렇게,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감당해내려 하는 어리석음이 단점이었어. 순간적인 판단력도 부족했어. 항시 냉철하여, 때로는 잔인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교훈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나는 그때 알았다. 인생은 학교가 아니다. 반복되는 시험도 아니다. 내 왼손은 으스러져 버렸고, 그게 끝이었다. 배울 것도 반성할 것도 없었다. 어떤 의미도 없었다.”


  인생은 한 번뿐이다. 우리의 모든 것들은 단지 한 번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과거가 될 뿐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냥 다 지나가 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인생에 있어 연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깨를 결려가며, 손가락에 상처를 내가며 두 손, 두 팔로 이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며칠 밤을 새워 작업에 몰입할 수 있었을 때 나는 행복했다. 그 행복만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전부라고 믿었던 것을 잃고도 살아갈 수 있다. 이 년 동안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환자. 한 남자의 골칫덩어리. 때로 오른손이 악화되면 자신이 쓴 물컵 하나 선반에 뒤집어놓을 수 없는, 철저히 쓸모없는 존재.”


  자신이 절대적으로 생각하던 것을 잃어버렸을 때, 삶은 허무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원래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을 잃어도 살아갈 수 있다. 이 세상에 처음 올 때 나는 아무것도 없었고, 이 세상을 떠날 때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떠난다. 내 삶의 가장 소중한 것도 사실 나의 것이 아니다. 


  “한번 불이 켜지고 나자,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이상한 강을 – 그때까지 한 번도 건너본 적 없는 – 건넌 것이다. 그 연극 속에서 울고 웃고 마음 졸였던 나는 이미 내가 아니었다. 예전에 미워했던 것들을 더 이상 미워할 수 없었으며, 그보다 나쁜 것은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들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남편도, 형제들도, 심지어 어머니까지도.”


  한번 지나간 것은 돌이키기 힘들다. 사랑도, 믿음도, 사람들 간의 관계도, 지나가 버리고 나면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강을 건너버리면 다시 원래의 위치로 가기에 힘든 것이 우리 삶이 아닐까?


  “집으로 가자. 그러나 어떤 딱딱한 덩어리가 가슴 가운데에서 느껴진다. 그곳이 내 집이 아니다. 나에게는 집이 없다. 이 삶은 나의 삶이 아니다. 어떤 정서적 유대도 느낄 수 없다. 어떤 장소, 어떤 기억, 어떤 미래에 대해서도. 뙤약볕을 간신히 가려주는 중간 키의 나무 아래에서 나는 오래 좌석버스를 기다린다. 내 얼굴에 흐르는 땀, 쇠약해진 다리의 비척거리는 느낌, 늘어뜨려진 두 손 – 몸의 작은 감각 하나하나에 집중한다. 나는 살아 있다. 이 순간 나는 살아 있다. 보고 듣고 숨 쉰다. 분명한 것은 그것뿐이다. 그것만이 나에게 남았다.”


  가장 편안한 곳은 내가 살던 집이었지만, 그 안의 구성원들이 변하고, 구성원 간의 관계가 변하면, 그 집은 더 이상 예전의 나의 집이 아니다. 그곳에서 쉴 수도 없고, 마음 편하게 지낼 수도 없다. 그동안 마음 편했던 집도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모든 상황에는 조건이 있다. 우리의 평화는 내 건강을 전제한 것이었다. 조건이 달라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만일 내가 그 사고로 죽었다면 우리의 다정함이 더럽혀지지 않았을 테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나는 지겹도록 아팠고, 내가 지겨운 만큼 그도 지겨워했다. 나를 지겨워하는 그가 나도 지겨웠다. 서로의 얼굴이 지겨워서 종종, 암묵적으로 서로의 눈길을 피했다. 그 과정에는 어떤 부도덕도, 죄악도 없었다. 당연한 일일 뿐이었다.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며, 그도 그때의 그가 아닌 것뿐이었다. 모든 것이 지나가 버렸을 따름이었다. 외딴섬에 단둘이 표류된 사람들처럼, 우리는 서서히 서로를 질식시켰다. 그렇게 다시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어 갔다. 서로에 대한 배려, 이타적 관계, 우정, 동료 의식 들은 강 저편에 남았다. 애초에 완전한 타인이었다는 것 – 그 한 가지 명료한 사실만이 이편의 강가에 남았다.”  

   

모든 것은 변해간다.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 것 자체가 오산이다. 사랑도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더 이상 아름다운 것들은 존재하기 힘들다. 사람 간의 관계도 변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이 변했다고 탓할 필요도 없다. 자신 또한 그 사람만큼이나 변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자신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심성이 여리고 다정했었다. 그러나 닳아간다. 타이어가 닳는 것처럼, 이런저런 일들을 몸으로 겪으면서. 그와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조금씩, 닳아간다는 것을 의식 못 하면서 조금씩, 바퀴가 미끄러워진다. 미끄러워지고, 미끄러워져서,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다.”


  노력하지 않는 한 변하는 사랑은 지나가기 마련이다. 사랑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화해하고 싶어도 화해할 수도 없다. 예전처럼 돌아가려는 노력이 없는 한 돌아갈 수도 없다. 처음 만나기 전처럼, 그렇게 완전한 타인의 관계로 나아갈 뿐이다.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사랑받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끊임없이 솟아나는 사랑의 샘물을 가져 타인에게 퍼부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한때 나에게 그 물이 약간이나마 고여 있었다면, 이제는 마른 흙바닥만 남아 있었다. 알고 있다. 거기에는 내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아니, 내 책임이 전부라는 것을. 사고를 당한 것은 불운이었지만, 그 후의 내 감정, 내 행동은 모두 선택된 것이었다는 것을.”


  사막의 물이 마르듯, 우리들의 마음도 그렇게 말라간다. 사막에 모래바람이 날리듯, 우리의 영혼도 모래바람처럼 날릴 수 있다. 사랑받으려 노력하지도 않기에, 사랑을 주려 애쓰지도 않기에 사랑은 그렇게 서서히 사라져 버린다. 


  “중동의 사막지방에서 서식하는 그 동물은, 불 속에서 사는 것으로 이집트인들에게 믿어졌었다고 거기 씌어 있다. 도마뱀의 재생력과 불의 정화력이 결합된 믿음일 것이다. 그 짐승의 징그러운 외양에 대조돼 더욱 돋보이는 무늬의 아름다움을 나는 오랫동안 음미한다. 이글거리는 태양에 가까운 지역이 아니라면 결코 새겨질 수 없을 화려함이다. 밝은 레몬 빛에 가까운 투명한 색채. 나비나 흰 새, 젊은 여자의 스카프에 어울릴 법한 강렬한 패턴. 노랑무늬영원, 하고 나는 입속으로 중얼거려본다. 영원이란 도롱뇽과에 딸린 속명일 뿐이라고 씌어 있지만, 그 동명이어의 울림은 가냘프게 내 마음을 움직인다. 왜인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미미한 움직임이다.”


  노랑무늬영원은 친구 집 아들이 키우는 도롱뇽이었다.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면 다시 재생이 되는 도롱뇽처럼 우리의 삶도 재생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가워져 가는 사랑도 다시 따뜻해지고, 미워하는 감정도 다시 좋아하게 되는 그러한 마음의 재생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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