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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Jul 30. 2022

존재가 사라져 버린 후

우리 주위에 있는 존재는 언젠가 사라져 버리기 마련이다. 영원히 내 곁에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나에게 왔다가 그렇게 떠나가 버린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건, 미워하는 사람이건, 나도 모르는 사이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항상 있을 것만 같은 존재도 어느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때, 홀연히 떠나가 버린다. 김인숙의 <개교기념일>은 나의 옆에 있었고, 나와 함께 했던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후에 관한 이야기이다.


  “무엇이 안 된다는 것이었을까.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병원 침대에서 수는 남편이 사고 현장에서 즉사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안 된다고. 그러나 무엇이... 남편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삼우제가 끝날 때까지도 병원에서 나올 수가 없었던 수는, 하루 두 차례씩의 정신과 진료 중에도 말문을 열지 못하며 자신이 마지막으로 입 밖으로 내질렀던 안 돼, 라는 소리의 공명에만 시달렸다. 그건 죽어서는 안 된다는 소리였을까. 이혼서류에 판사 도장을 받기 전까지는 죽어서는 안 된다고.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고. 자신이 되고자 했던 것은 이혼녀인 것이지, 미망인인 것은 아니지 않았느냐고... 그렇다면 법원에서 돌아 나오는 길에 그런 사고가 났더라면, 수는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았을까.”


  두 사람은 무던히도 싸웠다. 하지만 그들도 예전에는 가장 사랑하는 사이였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헤어지기 위해 기다리던 중 남편은 법원 바로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고, 그 현장에서 남편이 죽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된다. 


  “그러나 그 와중에 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다시는 어디에도 자신이 설 자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두려운 예감이 아니라 뜻밖에도 죽은 남편에 대한 애가 끓는 사랑이었다. 수는 밤마다 가슴을 움켜쥐고, 다른 그 어느 것도 아닌 사랑 때문에 울었다. 그러나 도대체 사랑이라니. 물론 한때는 사랑이었으니 결혼도 했겠지만, 그러나 같이 살고 싶은 욕구보다 따로 떨어지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해진 이후로는 사랑 같은 건 기억할 수 없었다. 밤마다 연속되던 싸움, 자신과 남편이 번갈아 가며 치렀던 외박과 가출, 이를 갈아붙이며 서로를 흠집 내던 일-그중에 어떤 것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말들도 있었다. 그러나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더라도 끝내는 내뱉고 말았어야 했을 말들, 그 말들에 찔린 상처 자국의 찔러대는 듯한 통증들. 그런데 남편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수는 말을 잃은 것처럼 그 모든 기억을 잊었다. 수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혼을 하려고 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했던 순간의 어떤 장면들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미워했던 사람이었는데, 서로에게 커다란 상처만 주고 같이 할 수 없을 것 같기에 끝내려고 했는데, 막상 그 존재가 사라져 버리고 나니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되는 경험을 한다. 그렇게 떠나보내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지만, 이제 떠난 사람은 더 이상 돌아올 수가 없었다. 


 “남편의 피투성이 상체가 보닛 위에 얹혀진 것을 목격한 이후, 수에게 남편의 모습은 그것만으로 국한되었다. 아직 사고가 나기 전 운전석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언뜻 본 듯도 싶었는데, 아마 푸른색 줄무늬 셔츠를 입었던 것 같은, 그러나 그 모습도 잘 기억되지 않았다. 이혼으로 가기 위해 맹렬하게 싸우던 나날들의 모습은 물론이고, 결혼식 날의 모습도, 연애 시절의 모습도 떠오르지 않았다. 수의 기억 속에 남편의 모습은 한 장의 사진으로만 남았다. 우그러진 차 보닛 위에 핏덩어리 상체로 얹혀져 있던 그.”


  함께 하면서 좋았던 순간도 많았는데, 행복하고 기쁜 순간들도 많았는데, 왜 그러한 순간들은 다 잊어버린 채, 미워하고 증오하고 분노하는 것일까? 그 함께 했던 많은 순간이 그렇게나 무의미했던 것일까? 소중했던 것들을 잊어버린 채 현재에만 침잠하는 우리는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 아닐까? 


  “나는 사라져버렸어. 너, 그걸 아니? 네가 피투성이 몸으로,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이의 차 보닛 위에 얹히게 될 때, 너 대신 너를 바라본 한 여자가 사라져 버려야 했다는 걸. 너로 인해 내가 사라지던 날 이후, 나는 늘 배가 고팠고, 나는 늘 입을 옷이 없었고, 그리고 나는 누구와도 말할 사람이 없었어.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건 네가 아니라 바로 나야. 나는 이렇게 먹을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말을 할 수도 있는데, 내 몸은 어디에 갔니? 내 정신은 여기에 놓아둔 채, 내 몸이 홀로 나를 빠져나가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거니. 나는 몸이 되고 싶어. 나는 몸이 되고 싶다. 나는 그 어느 것도 아닌 몸이 되고 싶다.”


  내 옆에 있던 존재가 사라져 버리니 나 자신이라는 존재도 서서히 사라져감을 느낀다. 살아있음을 느꼈던 순간도 이제는 희미한 기억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나 자신의 초라함에 삶의 의미를 서서히 잃어버리게 된다. 함께 할 수 있음이 좋다는 것은 그 존재가 떠나가고 나서야 알 수밖에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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