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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Sep 26. 2022

오늘 그 자리에서

 살다 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 사람들 중에 오래도록 기억이 남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최인호의 <산문(山門)>은 깊은 산속 오래된 사찰에 평생을 수행하며 살아가던 어느 한 스님이 만난 기억할 수밖에 없는 어느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인은 어째서 잉태된 지 넉 달이 되는 아이를 지워 버렸을까.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일까. 장래를 약속하고 서로 육체를 나눈 남자가 갑자기 마음이 변해서 돌아서 버린 것일까. 그날 밤 법운은 저녁 예불을 올리면서도 줄곧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여인의 눈빛으로 보아 여인은 간절히 뱃속의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소망은 무참히 짓밟혔다. 여인은 허름한 산부인과로 찾아가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었을 것이다. 전신을 마취한 후 여인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사랑하는 남자의 날카로운 쇠꼬챙이로 갈가리 찢어 잔인하게 죽여 버렸을 것이다.”


  새로운 생명은 사랑의 결과일 터인데 어째서 그 여인은 그 사랑도 잃고 새로운 생명마저 잃고 말았던 것일까? 그 새로운 생명의 반은 그 여인으로부터 온 것일 터인데 그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운명의 힘이 그리 컸던 것일까? 사랑의 어느 한쪽이 더 무거워 다른 사랑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일까? 푸르른 소망이 있었건만 어찌해서 그것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일까?


  “천도재를 지낼 동자상을 만들 때부터 법운의 가슴속으로는 처연한 슬픔이 고여들고 있었다. 법운은 그 동자처럼 갓난아기 때 법당에 버려진 아이로 발견되었다. 아무도 없이 빈 촛불만 타고 있는 법당 안에서 자지러지게 홀로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한 것은 노스님이었다. 여승들만 머무르고 있는 암자에서 법운은 자랐다. 젖이 나오지 않는 노스님의 젖을 빨면서 법운은 동승이 되었다. 노스님을 할머니로 여승들을 어머니로 부르면서 법운은 별 걱정 없이 자랐는데, 법운이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난 이후부터였다.”


  자신 또한 버려졌기에, 그 버림의 아픔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나마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만도 축복이었는지 모른다. 그 버림의 속세가 싫어서 깊은 숲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그 냉혹한 마음의 단면을 그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제련소의 굴뚝에서 미련도 애착도 미움도 증오도 슬픔도 원한도 번뇌도 탐욕도 모두 굴뚝의 연기와 더불어 태워 버리고 다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지만, 가슴속에 묻어 있는 한은 아직 남아 있는 마음속의 광석을 태워 쇳물을 뽑아내는 용광로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며 검은 연기를 뿜어대고 있었던 것이었다. 법운은 종이로 만든 동자상이 마치 이십여 년 전 포대기에 씌워져 법당에 버려진 자신의 분신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므로 내일 올리는 천도재는 그 여인이 낙태시킨 갓난아이의 영혼을 달래주는 다비장이기도 하였지만,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비참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영혼을 달래주는 진혼제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내내 법운은 마음이 무겁고 상심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누군가를 바랄 수가 없기에, 삶이란 별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남아 있는 시간도 별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되기에, 스스로 자신을 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는 깊은 산속에서나마, 머리를 깎은 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이를 위해 조그마한 위로라도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 그 자리에서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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