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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Oct 09. 2022

나를 넘어서는 빌런(Villain)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희대의 살인마 한니발 렉터(앤소니 홉킨스)와 FBI 요원 클라리스 스탈링(조디 포스터)은 범죄자와 수사관의 위치에 있었지만 어떤 동질성을 교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클라리스는 그녀의 아버지가 살해당했을 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나 어린 아이였기에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클라리스는 양처럼 아무런 힘이 없었다. 한니발 렉터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다. 빌런의 최고 단계였다. 


그런 한니발에게 수습 요원이었던 클라리스가 왜 보내진 것일까? 한니발 렉터의 과거 시절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최고의 악당인 한니발도 그가 어린 시절이었을 때 양과 같은 힘없는 존재였다. 둘 다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리투아니아에서 살았던 한니발과 그의 여동생인 미샤는 전쟁의 광기에 빠져있던 독일군을 피해 어느 농촌의 창고에 숨어 있었다. 한니발과 미샤에게는 그들을 지켜줄 부모나 그 누구도 없었다. 그들은 독일군에게 잡히면 곧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가장 은밀한 곳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독일군에게 한니발과 동생은 너무나 찾기 쉬운 사냥감에 불과했다. 보급이 끊기고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던 독일군에게는 모든 살아있는 것이 식량으로 보였다. 어린 여자아이였던 미샤를 본 순간 독일군은 가장 맛난 음식을 발견한 미친 늑대로 돌변해 버렸다. 아무 고민도 없이 독일군은 미샤를 잡아먹었다. 당시 한니발은 동생이 독일군에게 잡혀 음식으로 요리되는 것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양에 불과했다. 


  한니발과 클라리스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어떠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그렇게 잃어버렸다. 그 둘의 동질성이 그렇게 존재했기에 범죄자와 수사요원이라는 다른 위치에 있었을지라도 그들은 그 동질성을 교감할 수 있었다. 


  클라리스에게 한니발은 자신을 넘어서는 악당이었다. 악당의 능력이 수사요원보다 워낙 월등했기에 한니발은 클라리스에게 연쇄 살인마 버팔로 빌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었다. FBI 요원이었던 클라리스는 이러한 한니발의 도움으로 연쇄 살인마 버팔로 빌의 집에 들어가 그를 사살할 수 있었고, 인질이었던 피해자도 구할 수 있었다. 


  한니발 렉터는 자신이 양처럼 아무런 힘이 없어 동생인 미샤가 독일군의 먹잇감이 되었다는 사실에 복수의 칼을 갈기 시작한다. 미샤의 복수를 위해서는 양처럼 순한 존재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한니발은 가장 강한 존재로 변신하기 위해 노력한다. 힘없는 양에서 최고의 악당으로 변한 한니발은 동생을 잡아먹은 독일군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그들에게 선사한다. 피부를 벗겨내고, 귀나 코같은 부분을 물어뜯었고 물어뜯은 생살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씹어 먹었다. 


  클라리스는 한니발이 최고의 범죄자이며 가장 위험한 악당임을 알면서도 자신을 넘어서는 빌런임을 인정했다. 그러한 인정을 받은 한니발은 기꺼이 클라리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클라리스 이전에는 그 누구도 한니발에게 접근해 성공을 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클라리스였기에 한니발은 그가 알고 있었던 많은 것을 얘기해 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한니발은 아직도 양의 위치에 머무르고 있던 클라리스가 이를 극복하고 더 이상 양으로 살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클라리스가 버팔로 빌을 총으로 사살하고 난 후 한니발을 찾아왔을 때 그는 클라리스에게 묻는다. 

  “아직도 양의 소리가 들리는가?”

클라리스는 자신을 넘어서는 빌런이었던 한니발을 인정했기에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고, 그녀에게는 더 이상 양의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양들은 그렇게 침묵했던 것이다. 


  빌런이라는 존재를 밀어낼 생각만 해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다른 FBI 요원들은 단순히 범죄자이자 악당으로만 한니발을 인식했고 자신을 넘어서는 한니발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했기에 그들은 그 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수습 요원이었던 클라리사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빌런인 한니발을 인정했다. 한니발 또한 그녀가 자신과 같은 양의 처지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한니발이 그녀에게 어린 시절 가장 아픈 기억이 무엇인지 물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클라리사는 솔직하게 그녀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알려주었고, 그녀가 몬태나에 있었을 당시 있었던 양들의 경험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한니발은 이로 인해 클라리사 또한 자신의 어린 시절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이 신뢰가 되어 그녀를 도와주었던 것이다. 클라리사가 빌런인 한니발을 자신의 능력 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버팔로 빌의 무자비한 연쇄 살인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빌런이란 존재는 우리 주위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그가 나를 괴롭히거나, 그로 인해 나 자신이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이를 극복해 내야만 나는 성장할 수 있다. 빌런의 존재는 나 자신의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빌런 그 자체의 존재에만 집중하지 말고, 나 자신과 빌런을 객관적인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빌런은 단순히 나를 괴롭히는 악당인 것만은 아닐 수 있다. 


  한니발이 클라리스에게 공감을 하듯, 내 주위의 빌런들도 나에 대해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나의 능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탈링 또한 양에서 머무르지 않고 더 성장하기 위해 FBI 요원이 되려고 했던 것이고, 더 나아가 한니발을 정면으로 대하여 그를 인정했기에 최고의 요원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빌런은 나를 힘들게 하는 존재이지만 그 존재로 인해 나는 더 커다란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 기회를 어떻게 이용하는지는 양에 머물러 있을지 양을 구하는 위치로 나갈 수 있을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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