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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Oct 14. 2022

생사를 넘어서


  모든 것은 나고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온 것은 그 어떤 존재이건 언젠가는 떠나가기 마련입니다. 하루만 살다 가는 하루살이도 있고, 수십 년을 살아가는 동물도 있습니다. 수백 년을 살아가는 나무 같은 존재도 언젠간 가지가 부러지고 뿌리도 다해 이 세상과 작별을 해야 합니다.


  생명체뿐만 아니라 무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단단한 쇳덩어리도 비에 젖어 부식되어 녹이 슬고 그 붉은 녹은 점점 많아져 산산이 부서져 버립니다. 단단한 돌멩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에 쓸리고 바람에 의해 점점 작아지다가 그 흔적조차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도 언젠가는 그 생명을 다합니다. 우주 공간에 수천억 개의 별들이 존재하지만, 영원히 그 자리에서 빛나는 별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비록 그 수명이 상당히 길긴 하지만 별이란 존재도 예외 없이 언젠가는 우주 공간에서 삶을 마감하고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후에 어떤 것이 있는지는 모르나,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그 세상에서의 나는 지금과 같은 나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없음에서 와서 없음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잠시 이 세상에 존재할 뿐 영원히 이곳에 머무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후회 없이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에게나 혹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일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해 과연 질문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더 이상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알려고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냥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안다고 해서 죽음이 나를 피해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류는 역사적으로 죽음에 대해 많은 이론을 만들어 냈습니다. 철학이나 종교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논의했지만, 그 사람들도 예외 없이 모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죽음에 대해 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죽음을 경험하는 순간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도 아니기에 영원히 우리는 죽음을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단지 나에게 필요한 것은 죽음이란 예외가 없기에 그것을 인식함으로 삶을 겸손하게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을 많이 안다고 해서 내가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거나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에서 면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냥 그들을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닐까 합니다.


  젊은이도, 늙은이도, 어리석은 사람도, 지혜로운 사람도 모두 죽음에 굴복하고 만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숫타니파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로울 때가 있느니라.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전도서 3:1~9)”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써 누군가를 만나고 그를 사랑한 것으로 삶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어떤 것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기에, 무언가를 영원히 갈구하는 것은 헛된 욕심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충분히 사랑했다면 아쉬움이 그리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면 그것으로 족함을 아는 것 또한 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고, 할 수 있는 것을 다하지 못했다면, 오늘 그것을 하면 될 것입니다. 내일을 생각하지 말고 오늘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는 죽음이 함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죽음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며 삶과 함께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죽음을 누구나 경험할 수밖에 없기에 이를 부정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 같습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니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함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生死路隱 此矣 有阿米 次肸伊遣

吾隱去內如辭叱都 毛如云遣去內尼叱古

於內秋察早隱風未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

一等隱枝良出古 去如隱處毛冬乎丁

阿也 彌陀刹良逢乎吾 道修良待是古如     


죽고 사는 길 예 있으매 저히고

나는 간다 말도 못 다하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다이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누나

아으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내 도 닦아 기다리리다.

(제망매가, 월명사)”     


  사랑하는 누이가 죽었을 때 월명사는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생사를 넘어선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도, 미움도, 삶도, 죽음도, 만남도, 헤어짐도, 그 모든 것은 나에게 와서 나에게서 가고, 나 또한 모든 것에게 서 모든 것에서 떠나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사를 넘어서는 자유가 어쩌면 짧지만 이생에서 미련 없이 살아가는 진정한 대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그것이 나의 최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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