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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Jul 12. 2019

영화 <블랙스완>내 안의 흑조에게 자유를 허하라

심리학을 공부하면 자연스럽게 나와 가족이 심리분석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생긴다. 어머니는 불안이 높으신 분이다. 매사에 예민하고 수면제 없이는 잠을 못 주무신다. 영화 <블랙스완> 은 어머니의 불안의 원인에 대해 나름의 분석을 시도하게 된 계기가 된 영화였다. 


심리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프로이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히기도 했던 그는 인간의 인격이 원초아(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로 구성되어 있다고 얘기했다. 원초아는 본능적 욕구에 해당하는 부분이고 초자아는 완벽과 이상을 추구하는 성격의 도덕적인 부분이다. 에고는 초자아와 원초아 사이에서 완충과 중재의 역할을 하는 이성의 영역이다. 즉 인간은 욕망으로 들끓는 이드와 완벽하고 높은 도덕성을 추구하는 초자아를 에고가 적절히 분출하거나 통제하게 함으로써 성숙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욕망을 분출하려는 이드와 이를 통제하려는 초자아 사이의 압력에서 자아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산산이 깨진, 거울 조각 같은 여자가 있다. 영화 <블랙스완>의 주인공 니나이다. 영화는 이드와 슈퍼에고 사이의 경계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발레리나 니나의 불안한 내면을 거울처럼 비춰준다. 니나는 선배 프리마돈나 베스가 은퇴하자 <백조의 호수> 주역을 따내기 위해 오디션에 도전한다. 발레단 예술 감독 토마스는 니나가 순수한 백조로서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지만 자유분방하고 관능미 넘치는 흑조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는 평가를 내린다. 니나는 결국 배역을 따 내지만 자기 안의 흑조를 표현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 앞에서 심적 부담을 느낀다. 스물네 시간 딸을 완벽하게 통제하려는 엄마는 니나를 숨 막히게 하는 또 다른 짐이다. 다 큰 딸의 옷을 입혀주고 시시각각 딸의 거취를 확인하며 손발톱까지 직접 깎아주는 엄마로 인해 니나의 사생활은 통제되고 개인적 욕구는 억압당한다. 니나가 속이 거북하다고 케익을 거부하자 바로 쓰레기통으로 처박아 버리는 불안하고 미성숙한 성격의 소유자인 엄마는 니나의 내면을 잠식해가는 어두운 그림자였다.


니나의 엄마는 니나를 임신한 뒤 발레를 포기했고 자신의 못다 이룬 욕망을 딸에게 고스란히 투사했다. 엄마가 니나에게 하는 말, ‘나의 착한 딸’ 은 언제까지나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로 남으라는 명령의 다름 아니었다. 엄마의 언어를 내사 한 니나는 ‘착한 딸’로 남기 위해 매사에 완벽을 추구했고 발레에서도 완벽에 집착했다. 죽음 앞에서조차 그녀는 ‘나는 완벽하다’고 외칠 만큼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은 개별화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여러 가지 심리적 대가를 치르게 된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공생관계에서 벗어나 독립의 과정을 밟아야 하는데 니나와 엄마의 관계에서는 분리 개별화가 보이지 않는다. 엄마에게서 독립하는 순간 엄마가 견디지 못하리라는 것을 니나는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엄마의 욕망대로 영원히 착한 딸로 남아야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죄책감’이라는 또 다른 굴레가 그녀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니나 모녀처럼 가족 간의 경계가 불분명할 경우 아이의 정체감 형성은 방해를 받게 되고 자존감 낮고 불안정한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 


니나의 손톱이 자라면 바로 잘라주는 행위는 욕망을 거세시키는 상징적인 행위로 읽을 수 있다. ‘하면 안 돼’라는 금지명령을 내면화한 니나는 성적인 본능, 공격적인 충동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고 엄마의 말을 거역하거나 엄마가 원하는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상상해서도 안 되었다. 토마스의 ‘분출하라’ ‘너 자신을 놓아버려라’라는 요구를 니나가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다. 초자아로 상징되는 엄마에 의해 통제된 삶을 살아온 그녀에게 완벽한 테크닉을 요구하는 백조 역할은 너무나 쉬웠지만 욕망을 분출해야 하는 리비도인 흑조를 연기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이드의 상징인 릴리는 니나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다. 릴리는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매력으로 남자들을 유혹한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며 필요하면 마약도 서슴지 않는다. 릴리가 자신에게 다가왔을 때 니나는 욕망에 잠식당할 것 같은 두려움으로 불안에 떤다. 마약에 의존해 릴리와 성적인 접촉을 하고 억압된 욕망을 마음껏 분출하지만 결국 초자아로 대변되는 엄마가 베개로 누르는 장면으로 끝남으로써 니나가 욕망 분출에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결국 니나가 자아통합에 성공하지 못했음과 동의어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내 안의 이드를 적절하게 활용할 경우 생기 넘치고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성격 안에서 두 세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자아가 적절하게 중재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도하게 초자아가 발달한 니나는 욕망이 거세당한 채 이분법적 세계 속에 갇혀 있었기에 제정신으로는 두 세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없었다. 의식에서 분리시키거나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으로 여겨야만 버틸 수 있었다. 흑조가 표현해야 하는 충동, 공격성, 성적 본능, 파괴성, 질투의 감정을 자기 안에서 일깨워야 했지만 슈퍼에고로 무장한 니나는 이드의 욕구를 인정하는 데서 오는 자아의 불안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온갖 방어기제를 동원해 맞서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니나는 대역을 맡은 릴리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망상에 시달리다가 그녀를 찔러 죽이게 된다. 하지만 실상은 자신을 찌른 것이었고 이드로 대변되는 무의식의 어두운 그림자를 직면하지 못하면 자아는 파괴되어 스스로를 할퀴고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욕망은 억압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 과도하게 팽창한 이드와 이를 막으려는 초자아 사이에서 불안을 느낀 자아가 방어기제 사용에 실패하게 되면 자아는 깨진 거울 조각처럼 산산이 분열된다. 


‘불안’은 이드와 에고, 슈퍼에고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어느 한쪽이 비대해진 것에 대한 심리적 경고이다. 이드와 초자아 사이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니나는 결국 우리 자신이었다. 우리 안의 흑조를 죽이지 말고 무의식의 어두운 그림자에게도 날개를 달아주어야 한다. 욕망의 부름에 적절하게 답해 주어야 한다. 자연스러운 욕망조차 인정하지 않는 삶은 경직되고 차가운 석고상과 다름없다. 과도한 초자아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마저 부인하게 함으로써 삶을 불안의 테두리 속에 가둬버린다. 


어머니는 모든 것이 완벽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반면 매사에 느슨하고 헐거웠던 나는 어머니 눈에 한참 부족한 딸이었다. 자식의 부족함을 탓하는 말을 흘리듯 하셨고 그 말은 어린 가슴에 대못으로 박혔다. 엄마가 원하는 착한 딸로 살기 위해서 욕구를 억압했고 정체성 형성을 위해 ‘긴 시간’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허당끼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엄마 속을 뒤집어 놓았고 틀 속에 넣으려는 엄마와 들어가지 않으려는 무의식적 거부 행위 속에서 느꼈던 죄책감과 불안은 내 삶의 디폴트를 불안에 고정시켜 놓았다. 심리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불안’이라는 어두운 프레임 속에 갇혀 지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어머니의 삶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불안’의 정체는 지나친 완벽주의와 당위성 때문은 아니었을까? 어머니의 느슨하고 풀어진 모습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이제 그만 내려놓으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지만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 존재인데다 자신을 통찰하기엔 이미 너무 나이가 드셨다. 노여워하며 자식만 탓할 것이다. 한때는 내가 가진 심리학적 지식을 총동원해서라도 어머니를 변화시키고 싶었다. 삶을 돌아보고 문제를 인식해서 변화된 삶을 살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그저 어머니 말에 귀 기울이고 공감해 드리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고 싶다’ 대신에 ‘해야 한다’는 삶의 명제에 평생을 갇혀서 사신 어머니의 삶에 대한 연민이 미움보다 더 커서일까? 


곧 주말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영화를 보며 맥주 한 캔 하고 싶은 내 안의 욕망을 충실히 따르련다. 해야 할 일을 조금 미뤄둬도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은 채 말이다. ‘기필코’ ‘꼭’ 이란 부사를 달고 사는 삶은 피곤하다.


이제 내 안의 흑조에게도 자유를 허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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