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걸어도 걸어도>
피를 나누고 살을 섞는 관계인 가족은 누구보다 가깝지만 쉽게 상처를 주고 받으며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그 벽은 생각보다 단단해서 쉽게 허물 수 없다.
어렸을 때는 엄마가 최고였고 부모로서도 완벽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철이 들고 나서는 엄마 역시 허물 많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식에게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주는가 하면 분노와 불안을 거르지 않고 토해내는 바람에 자식들은 엄마의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기도 했다. "아무도 어른이 되지 않는다. 그저 어느 순간 늙을 뿐"이라는 말처럼 엄마도 어른이 되었다기 보다는 그저 어느 순간 나이가 들어 엄마가 되었을 뿐이었다.
가족은 사랑하고 연대하며 상처를 치유해 주는 특별한 관계로 인식되어져 왔다. 하지만 그 속살을 들여다 보면 반드시 그렇지 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는 사랑하기 때문에 ‘진실’을 보여줄 수 없을 때도 있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는 결코 하지 않을 말과 행동으로 고통을 주기도 한다. 연극 무대의 배우처럼 저마다의 진실을 가면 속에 숨긴 채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반복한다. 어쩌면 가족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완전한 진실이 아니라 절반의 거짓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그런 가족의 이야기다. 료타는 10년 전 바다에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다 죽은 형 준페이의 기일에 맞춰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부모님댁을 방문한다. 료타의 누나 역시 남편과 함께 도착해 제사준비를 도운다. 1박2일을 머무는 동안 료타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깊은 간극을 발견하게 된다. 멀쩡한 얼굴로 살아가지만 가족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안은 채 그저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오래전에 일어난 뜻하지 않은 사건은 가족들의 삶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고 살아 남은 자의 생을 뒤흔들었다. 그 날의 여진은 세월이 흘러도 잦아들지 않은 채 여전히 반복되고 있었다.
준페이 덕분에 목숨을 구한 아이는 이제 청년이 되어 료타의 집을 찾는다. 연신 땀을 흘리며 미안해 하는 그가 보기 딱했던 료타는 이쯤 했으면 이제 그만 불러도 되지 않겠냐며 어머니에게 한 마디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단호하다. 우리는 아들을 잃었는데 1년에 딱 하루 오는 게 뭐가 힘드냐며 료타의 말을 일갈한다. "증오할 상대가 없는 만큼 괴로움은 더한 거야. 그러니 그 아이한테 1년에 한 번쯤 고통을 준다고 해서 벌 받지 않아. 그러니까 내년 내후년에도 오게 만들 거야." 아들을 잃은 절망과 비탄 속에서 살아야 했던 어머니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냉정하게 쏘아 붙이는 장면은 잔인하고 섬뜩하기 조차 하다. 하지만 일말의 증오와 잔인함이라도 없었다면 어머니는 아들 없는 세월을 버티지 못했을지 모른다. 이에 료타는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한다.
아버지는 의사로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뭉친 고리타분한 노인이다. 자신의 업을 이어 받을거라 믿었던 똑똑한 큰 아들을 잃은 상실감에 바닷가를 서성이며 마음을 달래는 외로운 사람이기도 하다. 기대에 못미치는 둘째 아들 료타를 대놓고 무시하는 바람에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되고 싶다던 일기를 썼던 료타와 아버지 사이에는 이제 어색함과 소원함만 남았다. 몇 십 년의 엇나간 세월과 마음이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였다.
아들의 죽음과 남편의 배신 등 감당하지 어려운 짐을 지고 살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공감 받지 못한 어머니는 무심하게 던지는 말 속에 가시를 담아 내뱉곤 한다.
목욕을 하는 남편의 속옷을 챙겨 주며 예전에 남편이 바람 피웠던 일을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툭 던진다. 아버지는 기억도 희미한 일을 어머니는 가슴 속 깊은 상처로 간직하고 있었다. 둘째를 업고 남편이 딴 여자와 함께 있는 호텔을 찾아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 방 안에서 남편이 흥얼거렸던 노래를 들었고 다음날 레코드 가게로 가서 그 노래가 담긴 음반을 샀던 어머니의 속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식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어머니는 부부사이에도 둘 만의 노래가 있다면서 그 노래를 들려준다.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 나는 흔들려...” 라는 가사가 들려왔다. 남편에 대한 원망과 어린 아이들 때문에 차마 가정을 깰 수는 없었기에 인내해야 했던 시간을 노래를 들으며 위로받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무심하게 내뱉는 말 한마디로 소심하게 복수하는 사람이 소리 지르고 분노하는 사람보다 더 잘 견뎌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어머니는 모진 세월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필사적으로 버텨온 것이었다. 속상함과 서운함을 견디며 균열의 틈을 막기 위해 평생을 희생했던 어머니가 혼자서 들었던 이 노래가 내 귀에는 어머니의 삶이자 불안한 하루 하루를 걸어가고 있는 가족 모두의 노래로 들렸다.
하나 뿐인 형을 잃었고 형의 대리자 역할까지 해야 했던 료타의 고통도 외면할 수 없다. 자신과 형에 대한 기억을 혼동 하고 딴 소리를 하는 부모에게 서운함을 감추지 않는 모습에서 그의 상처를 읽을 수 있다. 료타가 결혼한 아내는 재혼녀였고 아들 또한 친자가 아니라 아내의 아들이었다. 겉으로는 친절하게 대해 주고 챙겨주지만 정작 며느리가 없는 곳에서는 ‘헌 것’ 이라며 뒷 담화를 서슴치 않는 어머니의 이중성과 "애 딸린 과부는 재혼하기도 어렵다"는 말을 대놓고 하는 아버지가 밉지만 어쩔 수 없이 목욕탕의 깨진 타일에 눈에 가고 아버지의 건강이 신경 쓰인다.
죽은 아들에 대한 죄책감, 형에 대한 열등감과 아버지에게서 느끼는 서운함, 사위를 믿지 못하는 마음과 며느리에 대한 못마땅 함이 뒤섞여 오랜만에 만난 가족의 밥상은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마주할 수 밖에 없는 벽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고 만다. 누군가는 골방에서, 누군가는 가시 돋힌 말을 내뱉으며 삶의 시련을 견디고 또 견딘다. 긴장의 팽팽한 현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그 상처를 후벼 파는 잔인함도 서슴치 않는다. 잔인함과 비정함에 의지해서라도 그들은 또 한 해를 필사적으로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어, 노란 나비다. 노란 나비는 말야, 겨울이 되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흰 나비가 이듬해에 노랗게 변하는 거래." 형 준페이의 산소에서 어머니와 나눈 말을 이제 어머니의 산소를 내려오며 료타가 아들에게 한다. 걸어도 걸어도 닿지 않는 마음은 늘 한 발짝 늦게 도착하고 어긋나기만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앞에서 작은 배처럼 쉼 없이 흔들릴지라도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기에 안간힘으로 버텨야 한다.
제사를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귀가하는 버스 속에서 어머니와의 대화 중에는 끝내 기억하지 못했던 스모 선수의 이름을 기억해 내고는 “늘 이렇게 한발씩 늦는다니까“ 라며 자신을 책망하던 료타처럼 우리도 늘 이렇게 한 발씩 늦는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