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인 마음여행자 Aug 28. 2018

한 병 딸까요?


한때 TV 뉴스에서 일명 ‘박카스 할머니’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방송은 풍기문란을 일삼는 성매매 여성 노인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기자들의 눈을 피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영업을 계속하는 화면 속 할머니들은 모자이크 처리되고 음성이 변조된 채 가십거리로 쉽게 소비되는 하찮은 존재였다. 겉으로 드러난 삶의 모습만 가지고 타인을 비난할 수 있는 자격이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 라고 묻는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성매매 할머니 ‘소영’의 내면으로 카메라 렌즈의 초점을 맞추었다.     


살다 보면 정답이 없는 질문에 부딪칠 때가 있다. 삶과 죽음, 나이 듦에 관한 것이 그것이다. 영화는 인물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와 에둘러 가지 않고 문제의식을 정면에 드러내는 연출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아프고 죽는다’는 서늘한 명제를 상기시켜 주었다.     


평생을 고단하게 살아온 예순다섯 살 소영에게 남은 것은 늙은 몸뚱이뿐이었다. 그녀는 가방에 박카스 몇 개를 챙겨 넣고 공원으로 출근한다. 공원을 배회하다 남성 노인들에게 다가가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운을 띄워본다. “한 병 딸까요?” 소영(윤여정)은 일명 박카스 할머니로 탑골공원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한다. 그녀는 제대로 돈 값을 하는, 죽여주게 잘 하는(?) 할머니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수치심을 감내하고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가 영업(?)을 위해 말을 걸어야 하고 고객의 비위를 맞춰야 그녀의 하루하루는 고단하기만 하다. 업무상(?) 얻은 질병으로 산부인과를 찾은 어느 날 한국 남자와 필리핀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 민호를 만나게 된다. 자기 아이가 아니라고 우기는 아이 아빠와 실랑이를 벌이는 엄마, 부모 사이에서 딱한 처지에 놓인 민호를 못 본 채 하지 못한 소영은 자신의 거처로 아이를 데려 온다.


소영이 사는 집에는 집주인인 트랜스젠더 ‘티나’와 몸이 불편한 피규어 작가 ‘도훈’이 함께 살고 있다. 그들은 ‘정상적이지 않다’ 거나 ‘부적응자’라는 평가를 받는 존재감 없는 소수 약자이다. 쉽게 조롱의 대상이 되거나 손가락질 받는 짠한 인물들이다. 우리 사회의 ‘소수자’를 대표하는 듯한 이들은 한 울타리 안에서 가난하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녹록지 않은 삶의 무게를 거북이 등짝처럼 얹고 살아가고 있지만 이들의 갈등과 고통은 정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당당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감당하는 모습에서는 품위마저 느껴진다.


한 지붕에 모여사는 소영네 가족의 일상은 소소한 행복을 나누며 경쾌한 에너지를 내뿜는다. 민호를 함께 돌보며 일상을 공유하는 이들은 피로 연결된 관계가 아니라도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영화는 무거워진다. "다들 손가락질 하지만 나같이 늙은 여자가 벌어먹고 살 수 있는 일이 많은 줄 알아?"라고 소영이 항변하듯, 성매매가 아니면 먹고살 길이 막막한 늙은 여자의 고통은 삶의 존엄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권리인 ‘존엄’을 지키기 위한 노인들의 사투는 그래서 더욱 눈물겹게 다가온다.     


어느 날 단골손님이었던 송노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을 가게 된다. 간병인이 없으면 대소변조차 처리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에 절망한 송노인은 소영에게 자신을 죽여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한다. 연민과 죄책감 사이에서 고민하던 소영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조차 없는 송노인을 ‘죽여주게’ 되고 이후 치매나 고독 등으로 사는 게 고통스러운 두 명의 노인을 더 ‘죽여준다’. 하지만 소영의 살인 행위는 범죄의 뉘앙스가 풍기지 않는다. 부탁을 받으면 필요한 물품을 사고 현장으로 가서 노인을 죽여주는 그녀의 행위는 오히려 경건한 의식에 가까웠다. 노인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는 사회의 냉정한 시선을 대변하듯 카메라는 시종일관 담담하고 건조하게 노인들의 삶을 따라간다.     


영화는 묻는다.' ‘늙은 것’을 ‘낡은 것’인가?' '비효율적이고 퇴락한 것은 가차 없이 버려져도 좋은 것은가?'를 거듭 질문한다. 노인문제뿐만 아니라 여성, 빈곤,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 종합선물세트 같은 우리 사회의 총제적인 문제들이 영화 속에 등장한다. 전쟁고아로 태어나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맞으며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소영의 삶은 ‘성장’이라는 단일 가치를 위해 무한 질주해 온 사회에서 태생적으로 잉태될 수밖에 없었던 그늘이고 아픔이었다. ‘개발과 성장’이라는 덫에 갇힌 사회에서 궤도에서 이탈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소영의 자리는 한겨울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한 줌 햇볕 만큼이나 인색했다.    


영화 속 노인들은 저마다 고독하고 외롭다. 소영은 그들에게 말벗이 되어 주고 친구가 되어 주며 외로운 노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 준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화와 소통이었고 소영은 그들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았다. 박카스 할머니와 남성 노인들의 만남이 낯 뜨겁거나 구질구질하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들의 만남과 이별이 공감되기 때문이다.     


노인을 죽여준 죄(?)목으로 소영이 잡혀가기 직전 세입자들과 집주인이 함께 모처럼의 나들이를 간다. 비록 하루 동안의 짧은 외출이었지만 즐겁게 하루를 보낸 일행은 집주인이 일하는 트랜스 젠더 전용 바에서 공연을 보는 것으로 오랜만의 여유를 마무리한다. 실제 트랜스 젠더인 집주인 티나가 직접 무대에서 ‘Quizas Quizas Quizas’를 노래한다. ‘Quizas Quizas Quizas’ ‘아마도, 어쩌면, 글쎄’ 등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내 귀에는 ‘죽여주는 여자’ 가 될 수밖에 없었던 소영의 처지를 이해해달라는 의미로 들렸다.     


뉴스 속 범죄 용의자를 향해 소영은 말한다. "저 사람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아무도 남의 속사정은 모르는 거거든" 소영의 말대로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몸뚱이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우주만한 크기의 사연을 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각자의 사연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이유는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서는 아닐까.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회에서 적어도 소영은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코피노 소년을 챙기고 길고양이 울음소리에 잠에서 깨서 음식을 챙겨 들고나가는 소영은 정 많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이지만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안부를 묻는 행위를 통해 험난한 세상을 통과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소영의 행위는 삶의 무대에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은 지키면서 퇴장하고 싶었던 노인들을 위한 변명이었다. 죽을 때까지 모르고 살 수도 있었을 또 다른 세상에 대해 알려준 영화 한 편으로 인해 좁디좁은 경험의 한계치가 조금은 확장되었다.


누가 소영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young_geul.1016/

블로그: https://blog.naver.com/mndstar87

매거진의 이전글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