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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Nov 29. 2019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외롭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더 이상 타인을 신경 쓰지 않고 살게 되었다. 전철 속에서 각자의 스마트폰을 응시하고, 대형 참사나 경악할 만한 사건이 터져도 나와 관계된 일이 아니면 쉽게 기억에서 지운다.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있어도 서로에게 완벽한 타인인 우리는 1인분의 고독과 외로움을 간직한 채 각자 살아갈 뿐이다. 낯선 도시에서 느끼는 외로움이 이제는 내가 숨 쉬고 살아가는 익숙한 공간에서도 똑같이 친숙하다. 다소 진부한 말이 되어 버린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외롭다.


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본 경험은 한 마디로 거대한 무의미의 바닷속을 허우적거리다 나온 느낌이었다. 신에게조차 따질 수 없는 불가해한 세상 속에 던져진 인간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보다도 위태롭고 아슬아슬했다.  


황량한 텍사스의 사막, 버석거리는 모래바람이 부는 그곳에서 퇴역 군인 모스는 우연히 멕시코 갱단들의 총격전 후에 남겨진 거액이 든 돈 가방을 발견한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고 그 돈이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모스는 욕망에 충실한 나방처럼 위험천만한 불길 속으로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위험부담까지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로 한 이날 이후로 희대의 살인마 안톤 시거가 그를 뒤쫓게 된다.


영화를 안 본 사람이라도 단발머리 살인마 안톤 시거는 한두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섬뜩한 사이코패스의 전형이었다. 보안관을 죽이고 경찰서를 탈출한 시거는 주유소 편의점을 방문한다. 영화 추천 방송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명장면이다. 물건값을 계산하던 편의점 주인이 인사조로, 지나온 곳의 날씨를 묻는다. 그러자 안톤 시거의 눈빛이 사나워지며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오?"라고 되묻는다. 당황한 주인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애쓰지만 이미 포식자의 사정거리에 들어온 이상 벗어날 길은 없어 보인다. 살인마 시거에게 살인은 귀찮은 돌을 치워버리는 정도의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상대의 고통에 무감했고 감정의 뇌가 제거된 인간처럼 걸리적거리는 자는 가차 없이 산소통으로 날려 버렸다. 냉혹한 킬러로서의 본능에 충실한 그는 존재 자체가 공포였다.


 당신은 거기에서 선 하나 도 지울 수 없어


“내가 여기에 온 것도 동전 던지기와 같은 거야. 인생은 매 순간이 갈림길이고 선택이지, 그림은 그려졌고 당신은 거기에서 선 하나 도 지울 수 없어. 당신이 가야 할 길은 처음부터 정해졌어” 결국 동전 던지기로 생사가 결정되는 가혹한 운명에 처해진 주인을 마주한 관객은 서슬 퍼런 긴장감을 느끼며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어찌해 볼 도리조차 없이 갑작스레 죽음의 문 앞에 당도한 편의점 주인의 운명은 허약한 삶과 잔인한 운명의 정확한 은유였다.


영화 속에서 그는 불행의 전도사였다. 산소통을 들고 등장하면 어김없이 살인이 일어났고 현장은 유혈이 낭자한 비극적 장소로 바뀌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불안과 긴장은 관객이 느끼는 서스펜스를 극대화했다. 살인은 이유가 없었고 대상도 불특정 다수를 향했다. 모든 것이 그저 우연일 뿐이었다. 이 세계의 작동 방식인 우연, 비논리성, 무목적성이 안톤 시거라는 악마로 인격화 한 것이었다.


사건 이후에 노련한 보안관 벨이 합세하면서 목숨을 건 세 사람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된다. 벨은 은퇴를 앞둔 노인이다. 오랜 관록의 보안관답게 사건 현장에서 날카로운 통찰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범인의 뒤를 쫓지만 매번 한발 늦게 도착한다. 정의와 도덕을 위해 악에 도전하지만 늙은 보안관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사고와 속도의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그는 시거를 잡지도, 모스를 보호하지도 못했다. 보안관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능력이 이제 그에게는 없었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이 설자리, 자신이 만들어 갈 나라가 없다는 것을 실감한 벨은 은퇴를 결심한다.


 ‘왜?’라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결국 모스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의 부인마저 목숨을 잃는다. 거액의 돈과 마약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모스 부인까지 찾아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거는 그녀를 찾아갔고 그를 본 순간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다. ‘왜?’라고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삶의 부조리, 혼돈의 무질서 앞에서 질문은 무의미할 뿐이었다.


하지만 살인마 시거에게도 나름의 원칙은 있다. 바로 ‘우연성’이다. 동전을 던져 사람의 생사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우연성'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불쑥 찾아온 죽음과 ‘우연성’이라는 예기치 않은 손님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가 인간이다. 생과 사를 한순간에 갈라놓고 타인의 운명을 쥐락펴락했던 시거였지만 그 역시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해한다. 결국 그도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오늘을 살아남았으니 내일을 또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는 내내 BGM이 없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 어떤 음악도 없이 관객을 긴박한 서스펜스로 몰아간 것은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 덕분이었다. 스페인의 국민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의 걸출한 연기는 말할 것도 없다. 그가 없는 영화는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영화사에 길이 남을 악역을 창조해냈다. 바르뎀의 소름 끼치는 연기는 관객의 눈길을 한순간도 스크린 밖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영화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누구에게나 닥치지만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죽음’에 대한 간접 체험이었다. 남에게 아무런 해를 입힌 적도 없고, 평생을 죄짓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도 우연한 계기로, 사소한 실수로 인해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현실, 어디에도 삶의 안전망이 확보되지 않은 세상에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서늘한 진실을 마주하게 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묵묵히 살아갈 수밖에 없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기에 우리는 닥쳐오는 삶을 감당해야 한다. 오늘은 살아남았으니 내일을 또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두운 화면과 눅진한 공기는 목을 조이는 듯 답답했다. 서로에게 무심한 세계 속에 무기력하게 내동댕이쳐진 개인, 황량한 텍사스의 풍광이 담아낸 희망 없는 세계는 내 마음에도 묵직한 돌 하나를 부려 놓았다.


 영화가 끝났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영화 속 피해자가 당하는 고통은 이유가 없다. 우연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사람은 상황을 통제할 수 없을 때 불안에 빠진다. 우연이라는 괴물, 예측할 수 없는 삶은 그래서 공포스럽다. 그렇다면 이런 무의미의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영화는 끝내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무수한 질문만 던져 놓은 채 매정하게 끝나 버렸다. 암전 된 화면 속에는 텅 빈 허무의 바다만이 흐르고 있었다. 감독의 잔인함에 머리가 멍했다.


 어쩌라고! 이럴 수는 없었다. 영화가 끝났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다시 한번  영화를 봐야   같다. 기필코 작은 단서라도 찾아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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