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초에 우리 부부의 첫 부부싸움의 원인은 치약이었다. 가운데를 꾹 눌러서 쓰는 나와 달리 남편은 밑에서부터 순서대로 치약을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왜 밑에서부터 사용하지 않느냐’는 남편의 핀잔에 ‘그깟 치약을 어디서부터 쓰는가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냐’고 대들었다. 유치하기로 따지자면 초딩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사소한 문제가 사실은 두 사람의 극명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임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모든 일을 미리 계획한 뒤 순차적으로 처리하기를 좋아하는 남편과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비로소 움직이는 나는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연애할 때의 ‘매력포인트’가 결혼생활에서는 반드시 고쳐야 할 ‘바람직하지 못한 습관’으로 순식간에 평가절하 되었다. 다름에 끌려 결혼한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다름’으로 인해 치열한 부부싸움의 서막을 열었다.
인간은 서로 다른 기질적 특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유전자를 나누어 가진 부모 자식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갓 태어난 신생아도 서로 다르게 행동한다. 아이의 행동에 따라 양육자도 각기 다르게 반응하게 되어 같은 형제자매간에도 부모와 서로 다른 역동을 경험하게 된다. 개인의 고유한 개성과 독자성이 만들어지는 정서적 배경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나와 다른 기질의 아이를 키울 때였다.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부정적인 감정이 쌓여갔다. 마음속에만 담아두어야 할 말이 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아이 가슴을 겨냥하기도 했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난 후였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아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큰 아이와 갈등의 골이 깊었던 이유는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인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아이의 기질은 ‘나쁜 성격’으로 규정지은 뒤 내 마음대로 바꾸려 했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분노했다. 엄마의 마뜩잖은 시선을 받은 아이는 자존감을 많이 다쳤다. 스스로를 부정적인 존재로 여기고 내 말과 행동을 그래도 내면화해서 자기 평가의 프레임으로 사용했다. “네 생각을 좀 더 똑똑하게 표현해 봐” “왜 이렇게 느리고 굼뜨니?” “도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생각 없이 던진 말의 파편은 아이 내면에 시루떡처럼 쌓여갔고 자신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로 작용했다. “생각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나는 한심한 애야” “내성적이라서 사람들이 날 싫어할 거야” “꿈이 없어” 자신을 바라보는 창은 어느새 부정의 말로 차고 넘치게 되었고 자존감이 들어설 작은 자리조차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부모가 아이의 기질을 잘 파악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때 아이는 기질에 지배되지 않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다듬어 갈 수 있다. 하지만 큰 아이를 키울 때는 나도 엄마가 처음인지라 지식도 여유도 턱없이 부족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내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없다. 내가 가진 자원을 과소평가하거나 나의 ‘다름’으로 타인에게 어떤 불편을 줄 수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 기회를 놓칠 수도 있고 갈등과 문제를 피해 갈 수 없게 되기도 한다. 학창 시절, 타고난 내향성으로 관계 맺기에 서툴렀고 낯을 심하게 가렸다. 덕분에 ‘소극적이다’는 평가를 받으며 자존감이 곤두박질쳤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바꾸고 싶었던 나의 ‘다름’을 ‘깊이 있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신중하고 사려 깊은 사람’으로 바꾸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단점으로만 여겼던 내 모습의 이면은 또 다른 누군가는 닮고 싶은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타인의 ‘다름’에 대해서도 인지하지 못하거나 수용하지 못하면 갈등을 유발하고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상처를 주고받는 일을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갈라 서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모임에서 만난 A는 성격이 쾌활하고 표정도 항상 밝았다. 명랑하고 긍정적인 면이 나쁘지 않았지만 말이 지나치게 많았고 목소리도 유달리 컸다. 남의 얘기를 듣기보다는 자기 말만 하기 바빴다. 시간이 지나면서 힘이 들었다. 피로감이 쌓이다 보니 그 사람이 온다고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결국에는 그 모임 자체를 포기하고 말았다.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던 나는 이번에도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했다.
이해와 수용 대신 거부의 카드를 뽑은 것은 그 사람의 잠재력과 시너지도 함께 포기하는 결과를 의미했다. 다방면의 지식이 많았고 일에 대한 열정도 남다른 사람이었기에 나에게 중요한 자원이 되어줄지도 모르는 든든한 지원군을 놓쳐버린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순간이었다.
혐오의 시대가 도를 넘어 서고 있다. 급식충, 맘충, 틀딱충 등 전 세대를 벌레로 아우르는가 하면 꼰대, 된장녀 등 말이 칼이 되어 서로를 찌르는 형국이다. 갈등과 대립으로 야기되는 심리적 피로감과 사회적 손실 또한 크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심지어 일란성 쌍둥이도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닮은 것은 아니다. 어떤 사회나 집단에서도 다름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으며 피해갈 수 없다는 얘기다.
자신의 ‘다름’을 이해하고, 타인의 ‘다름’을 수용한 뒤 각자의 ‘다름’에 기반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좋은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갈등이 생겼을 때도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다르다고 비난하는 대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별 것 아닌 마음이 불통이라는 거대한 벽을 넘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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