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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Oct 29. 2019

당신은 내가 원하는 부모인가요?

카프카는 평생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글을 쓰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욕망에  따라 법학도가 되었고 보험회사 직원으로 평생을 살았다. 낮에는 회사 일을 해야 했기에 주로 밤에만 글을 써야 했고 고된 이중생활은 그에게 괴로운 고문이었다.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지만 우리는 그가 천재적인 작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부모의 기대 속에서 자아가 망가진 사람이 비단 카프카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게 나 좋자고 그러는 거냐?’ ‘다 너 잘 되라고 그런 거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낯익은 말이다. 부모의 과대한 기대심리 속에는 자녀의 업적이 곧 부모의 자존감이라는 등식이 자리하고 있다. 내가 이루지 못한 욕망을 자녀가 대신 이루어주길 바라는 보상심리도 있다. ‘이번 시험 잘 보면 핸드폰 바꿔줄게’ ‘성적이 오르면 네가 갖고 싶은 거 사 줄게’라며 조건을 내거는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자기를 위해 밤낮으로 희생하는 부모를 보며 자녀는 부채감을 키운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하지만 부모가 그랬듯이 아이 또한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아이들은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해서, 대기업에 취업하지 못해서 ‘부모님께 미안하다’고  말한다. 자녀의 실패(?)에 대해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네가 행복하면 되지, 사는 게 별거냐?’고 쿨하게 말하지만 아이들은 알고 있다. 내심 좋은 대학, 버젓한 직장을 바란다는 것을. 자신에 대한 실망감은 낮은 자존감으로 이어지고 부채감까지 얹어져 풀기 어려운 복잡한 방정식이 된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 아이가 혹시 천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본 부모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둘째가 유달리 일찍 한글을 떼서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었다. 재능 있는 아이를 위해 무언가를 해 줘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생기면 부모는 조급해진다. 아이 손을 잡고 영재 테스트를 받고 영재학원으로 향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혹시나’는 ‘역시나’로 끝난다. 내 경우도 물론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 끝나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은 부모도 있다. 자신이 바랐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혹시나’와 ‘역시나’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부모가 아이에게 기대를 품는 것이 물론 잘못은 아니다. 부모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이자 기쁨이기도 하다. 긍정적인 기대는 아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부모가 보이는 반응이 문제다. ‘왜 이것밖에 못하냐?’ 고 화를 내기 시작하고 아이를 닦달하기 시작하면 자녀는 불행의 늪에 빠지게 된다. 부담감과 죄책감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다. 부모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한 아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모의 기대와 요구에 맞추려고 애쓴다.  

  

초등학교 다닐 때 공부의 목적은 오로지 ‘엄마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공부를 제법 했더니 엄마의 기대가 하늘을 찔렀다. 받아쓰기를 틀리거나 수학 문제 하나만 틀려도 야단을 맞았다. 시험 때마다 긴장해서 이름을 쓰는 난에 ‘최’라고 쓰는 대신 매번 ‘초’라고 썼다. 일종의 시험불안 증상이었다. ‘공부 잘하는 딸’에 대한 엄마의 욕망은 ‘공부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내 욕망으로 대치되어 나타났다. 한창 뛰어놀아야 할 어린 시절에 엄마를 실망시키기지 않기 위해 공부에 매달렸다. ‘공부 잘하는 딸’이 되어야만 사랑과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작용은 나중에 나타났다. 정작 열심히 공부해야 할 고등학교 시절에 책상에 엎드려 잠만 자느라 엄마의 기대와는 한참 멀어졌다.     


아이에 대한 기대는 애초에 부모가 일방적으로 시작한 것에 불과하다. 아이는 동의한 적도 없고, 기대를 가져 달라고 애원한 적도 없다. 그저 착한 아이가 되어 사랑받고 싶은 욕망 외에는 없다. 다행히 기대에 부응해 주면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부모의 환상을 채워주지 못했다고 화를 내는 건 억지에 가깝다. 자식도 엄연히 타인이며 나와 성격도 다르고 취향과 감정도 모두 다르다.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모의 욕망과 기대에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면 자녀를 소유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 취급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일본 영화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는 “부모가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일찍 죽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한 인간이 주체적인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부모와의 결별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과정을 제대로 겪지 않으면 억압된 감정이 내면을 장악하게 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타인의 평가에 집착해서 눈치를 보느라 정작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자녀를 기쁘게 떠나보내자. 그리고 부모도 부모의 인생을 살자. 이기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다. 열심히 사는 부모를 보며 아이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진짜 어른이 된다.     


부모가 아이에게 기대를 거는 만큼 아이도 부모에 대한 기대가 있다. 자녀가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길 강요하기 전에 ‘당신은 내가 원하는 모습의 부모인가요?’라는 아이의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지 먼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이게 다 널 위해서’ 란 말이 ‘엄마, 아빠 탓이야’라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오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young_geul.1016/

블로그: https://blog.naver.com/mndstar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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