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연명치료 거부 사전 의향서에 동의하셨다. 기분이 착잡했다. 현재 연명의료를 거부한 환자가 3만 6천 명에 이르고, 사전 의향서를 작성한 사람도 11만 5천 명에 달한다고 한다. 죽음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변화고 임종 문화도 점차 변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지수다. 의료기술이 점점 발전함에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있지만 의미 없는 생명연장은 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안락사에 관한 논쟁도 함께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5월 호주의 104세 식물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는 존엄한 죽음을 맞겠다며 안락사가 합법화된 스위스로 향했다. 그는 자살을 돕는 비영리단체의 도움으로 정맥주사기에 연결된 밸브를 직접 돌렸다. 생명의 자기 결정권을 행사한 것이다. 의료진과 손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베토벤 교황곡 9번, <환희의 송가>를 들으며 존엄한 죽음을 맞았다. 기자회견에서 박사는 “6년 전부터 시력이 몰라보게 떨어졌고 더 이상 삶을 이어가는 게 의미가 없다”고 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존엄사는 허용되지만 독극물 주입 등으로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구달 박사가 스위스까지 날아간 이유였다.
평소 입버릇처럼 혹시라도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연명치료를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를까 봐 우려하셨던 어머니는 이런 제도가 생겼다고 누구보다 반기셨다. 살아생전 당신 손으로 직접 삶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하고, 자식들의 짐을 들어주고자 하셨다. 좀 더 나이가 들면 나 역시 그렇게 하겠지만 막상 부모님이 연명치료 거부의사를 밝혔다고 하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영화 <씨 인사이드>는 스물다섯 살에 다이빙을 하다가 바닥에 머리가 부딪치는 사고를 당한 후 27년을 ‘죽은 몸뚱이에 머리만 붙어 있는 사람’이 되어 가족들의 도움으로 살다가 안락사 권리를 위해 투쟁한 ‘라몬 삼페드로’의 투쟁의 기록이다. 영화를 보면서 안락사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문제의 본질은 ‘생명’이 아니고 ‘고통’에 방점이 찍혀야 했다. 라몬의 경우 하루하루가 고통이었고 더 이상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가족들에게는 평생 돌봐야 할 ‘짐’이었고 눈을 뜨는 순간 삶의 고통이 또 하루 연장되었다는 절망감 외에 다른 의미는 없었다. 생생한 삶의 고통 앞에서 그는 안락사를 위해 교회와 법정, 언론을 상대로 힘겹게 싸워야 했다. 말 그대로 ‘죽기 위해서 죽을힘을 다해’ 투쟁했다.
그동안 안락사에 대한 논의는 안락사에 대한 찬반 여부의 문제로만 다루어졌다. “신이 주신” “고귀한 생명”을 “인간의 손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 안락사 허용을 반대하는 입장의 논리였다. 영화 속에서 아들이 죽은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아들이 죽으려고 한다는 것이라고 얘기한 늙은 아버지와, 자신의 집에서는 자기가 죽기 전엔 누구도 죽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라몬의 형을 비롯해서 가족 모두가 존엄사를 반대한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관념적인 죽음에 압도당해 타인의 삶에 개입하기를 꺼리고 생명 윤리 운운하며 환자의 고통을 외면한다. 남겨진 자의 고통과 죄책감이라는 또 다른 명분을 추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라몬에게는 실체가 느껴지지 않는 관념적인 죽음의 공포보다 ’ 여기 지금‘ 삶의 고통이 훨씬 더 생생했다. 그가 그토록 죽고 싶어 했던 이유였다.
그동안 우리는 생명은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신성한 신의 영역’이라는 당위와 ‘남겨진 자의 고통’ 뒤에 숨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환자의 고통은 외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당위적인 윤리에 갇혀 환자의 고통을 볼모로 기존의 통념을 수호하는 행위는 과연 윤리적으로 합당한 것일까? 고통에 귀 막고 남은 자의 윤리적 딜레마를 회피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를 보는 동안 주인공 라몬의 고통보다는 자식을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의 고통에,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형의 절망에 더 쉽게 감정이입되었다. 삶을 제 손으로 멈추는 행위, 생명을 인위적으로 없애는 행위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직 신만이 관장하는 범접할 수 없는 세계라고 단정 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은 언제나 개별적이다. 개별 자아의 죽음 속에는 보편성이 없고 일반화의 테두리 안에 가둬 두기엔 수많은 특수성이 존재한다. 어떤 사람도 정확히 동일한 상황에 처할 수 없고, 오로지 그 상황 속에서만 이해되고 가능한 선택이 있을 뿐이다. 자신 외에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은 분명히 존재한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고통받는 자의 시선에 가까스로 닿을 수 있게 되었다. 영화는 안락사 문제의 본질이 ‘생명’이 아니라 ‘고통’이고, 의료행위의 윤리문제를 따지기 전에 인간의 본질적인 윤리 문제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에 대한 화두를 던져 주었다. 삶과 죽음의 대립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진정한 공감과 이해로 논의로 초점이 모아질 때 자유의 남용이 자칫 불러들이기 쉬운 여러 가지 문제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씨 인사이드>는 약자의 고통을 볼모로 사회문화적인 당위와 규범 속에 매몰된 경직된 태도가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가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졌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장면에서 라몬은 할 말을 마치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독극물을 마신다. 오랜 시간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고민한 끝에 내린 이성적인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라몬의 절실함 속에는 생명에 대한 어떤 경시도 담겨 있지 않다. 그는 허무주의자도 아니었고 비관론자도 아니었다. 오로지 진정한 자유를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이었다. 그에게 삶은 소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너무나 소중했기에, 자유가 배제된 삶 대신 존엄한 죽음을 택한 것이었다.
삶의 끝에서 맞이한 마지막 축제에서 “나의 죽음도 결국 나의 삶, 나의 선택이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구달 박사처럼 어머니의 싸인을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의 상징적인 행위로 존중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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