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독서모임에 참여하면서 좋은 경험을 많이 얻고 있다. 전공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다 보니 책 얘기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정보를 접할 수 있고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저마다 생각이 다른 것을 보며 느끼는 재미가 솔솔 하다.
지난달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선정 도서에 대한 나누기가 끝나자 현재 고민하고 있는 문제와 관련해서 각자가 느끼는 한계와 고충에 대한 솔직한 담론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일과 가정의 양립이 힘들다 했고, 누군가는 비전이 보이지 않는 직장생활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토로했다. 겉으로는 우아하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물 밑으로는 쉴 새 없이 발차기를 하고 있는 백조가 떠올랐다. 일말의 불안과 얼마간의 고민을 동반자 삼아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현대인의 삶이 애처로웠다.
대화는 점점 무르익어갔고 C의 차례가 되었다. “매일매일 끝도 없이 반복되는 삶이 권태롭지 않으세요? 나만 그런가?” 라며 조금은 뜬금없는(?) 얘기를 꺼냈다. 상사에 대한 자잘한 불만이나 가족 문제와는 급(?)이 다른 고민이라 좌중의 시선이 집중됐다. C의 말이 끝나자 화제는 자연스럽게 삶에 관한 문제로 전환되었다. 개인적인 생각이 오갔고 고민하고 있는 C를 위해 저마다의 처방도 내놓았다. 나는 그녀의 고민을 ‘실존’에 관한 문제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각자의 경험에 근거한 ‘권태 극복’ 노하우를 전수하기 바빴을 때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C가 속으로 ‘얼마나 답답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의 고민에 대한 답을 나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섣불리 처방을 들이밀 수는 없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무화시킨다. 시간을 거스를 수 없음은 자명한 이치이므로 시간과의 싸움에서 필패할 운명을 타고난 인간의 삶은 권태롭고 공허하다. ‘권태’의 사전적 의미는 ‘바로 앞을 짐작할 수 있고 단조로우며 벗어나기 힘든 상태에 있거나, 상황이 너무 오랫동안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의 상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행복의 두 가지 적은 고통과 권태이다’라고 했고 키에르케고르는 "지루함은 모든 악덕의 뿌리다!"라고 말했다. 소설가 이상은 요양차 평남 성천에 머물렀을 때의 경험을 ‘권태’라는 작품에 담아냈다. 많은 소설가와 철학자들이 이에 대해 사유한 흔적을 남긴 것은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권태의 본질 때문이 아닐까.
‘권태’라는 불청객이 찾아오면 인간은 무기력해지고 허무주의에 빠진다.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자극을 찾아 헤맨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보바리 부인>에서 “소리 없는 거미와도 같은 권태가 마음 구석구석의 그늘 속에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고 했다. 거미줄처럼 얽기고 섥킨 권태가 삶을 좀먹는다고 느꼈을 때 엠마는 쾌락으로 도피하지만 쾌락 또한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쾌락이 아니다. 쾌락의 강도는 높아지고 마음의 수렁은 깊어진다. 결국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택한 선택지는 그녀를 더 깊은 공허 속으로 이끌었다. 삶은 권태와 공허 사이를 시계추처럼 반복하는 일이다. 일상의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권태와 맞닥뜨리게 되고 권태를 피해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공허와 마주하게 된다. 지금, 여기의 삶에서 행복을 느낄 수 없다면 누구라도 엠마가 될 수 있다.
<권태 그 창조적인 역사>의 저자 피터 투이는 권태와 소외감은 근대의 산물이라고 했다. 그는 식민지 지배자들이 백인의 문명인 시공간의 표준화 및 조직화를 강요하는 순간, 호주 원주민들에게도 권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했다.
척박한 몽골 사막에서 계절마다 이동하는 유목민들의 삶을 스마트폰 화면으로 지켜본 적이 있다. 언뜻 생각하기에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 버터와 우유, 양고기가 전부인 단조로운 식생활, 척박한 땅과 기후는 권태가 자리 잡기 좋은 환경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24시간, 1년 12달, 생존을 위해 가축을 방목해서 먹거리를 마련하고 계절이 바뀌면 이동식 주택인 게르를 접어 새로운 정착지로 떠나는 이들의 삶 속에 권태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티베트의 차마고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천 길 낭떠러지가 발아래 펼쳐지고, 한 사람이 겨우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길, 금방이라도 수십 명을 집어삼킬 것 같은 험한 계곡을 밧줄 하나에 의지해 건너야 하는 삶은 보는 이들의 심장마저 쪼그라들게 한다. 삶의 조건은 척박했고 매 순간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워 자연과 싸우고 바쁘게 움직여야 겨우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이들에게 권태는 어쩌면 사치일는지 모른다. 소비지상주의, 자본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면서 인간의 영혼은 권태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같은 것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을 긍정할 때 지겨운 반복은 더 이상 반복이 아니다. 똑같이 주사위를 던지더라도 매번 새로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희망을 가지고 주사위를 던지듯 시도하고 도전하라고 말한다. 니체의 말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삶의 순간순간이 영원히 되풀이된다면 우리는 매 순간 온 힘을 다해 주사위를 던져야 한다.
그러니 ‘아모르파티(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고 스스로에게 타이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