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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Jun 05. 2020

영화 <가버나움> 소년은 왜 부모를 고소했을까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소년’은 연두빛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다. 파릇파릇한 물이 금방이라도 배어 나올 듯 싱그럽다. 장난끼 가득한 눈과 천진무구한 표정은 생명력으로 꿈틀거린다. 하지만 나딘 라바키 감독의 영화 <가버나움> 속 열두 살 소년 자인은 상식을 깨트리고 상상을 뛰어넘는다. 얼룩 덜룩 때가 낀 얼굴과 남루한 옷차림, 12살 아이의 표정이라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삶에 지친 얼굴과 “사는 게 개똥같다”는 말을 서슴치 않고 내뱉는 소년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가난한 집 맏이인 자인은 소란스러운 거리에서 밥벌이를 위해 주스를 판다. 어른들의 협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좀도둑질도 거리낌 없이 한다. 무료 음식을 받기 위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비참한 생활이지만 자인에게는 사랑스러운 여동생 사하르가 있다. 소년은 소녀를 살뜰하게 챙긴다. 하지만 갑자기 초경이 시작된 사하르가 동네 슈퍼마켓 주인 아사드에게 팔려 가듯 시집을 가자, 참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온다. 이 후 우연히 불법 체류자 라힐을 알게 되어 그녀의 집에서 한 살배기 어린 아들 요나스를 돌보며 함께 살게 된다. 어느날 라힐이 갑자기 체포당하고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자인은 요나스와 둘이 남겨지게 된다. 



엄마가 차려준 따뜻한 밥상을 마주하고 친구들과 마음껏 뛰놀며 때로 게임에 정신이 팔려있는 또래와 달리 자인의 일상은 잔인하기만 하다. 출생기록이 없어 정확한 나이도 알지 못하는 자인은 요나스를 스케이드 보드 위에 묶은 냄비에 태우고 거리를 헤맨다. 체포당한 라힐을 대신해서 요나스의 보호자가 된 소년은 최선을 다해 아이를 보살핀다. 무자비한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소년은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도 버거웠지만 자기보다 어리고 약한 아이를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장바닥을 헤매고, 길거리에서 음식을 먹는 이 아이들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닥까지 추락한 레바논의 현실에서 거리의 아이들은 더 이상 일상의 도드라진 풍경이 되지 못했다. 15년간 이어진 내전으로 양산된 수십만 난민 중 하나에 불과했다. 



11살 어린 나이로 시집간 사하르는 결국 임신을 했지만 하혈로 숨지고 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자인은 분을 참지 못하고 사하르의 남편을 칼로 찔러 상해를 입힌다. 자인은 수감되어 부모와 함께 법정에 서게 된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책임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이를 낳아 여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의 삶 역시 비극의 구렁텅이에 빠트린 부모에 대한 분노의 외침이었다. 동생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과 세상을 향한 원망에 지친 소년이 화살을 자신의 존재에게로 돌리는 장면은 먹먹했다. 



변호사는 사하르의 남편 아사드에게 사하르가 결혼이 뭔지 아는 나이라고 생각하는지 묻는다. 그는 “이미 꽃이 피었으니까”라고 답한다. 조혼풍습에 희생되는 여아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는 이슬람 사회의 추악한 민낯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에 자인이 날카롭게 쏘아 붙인다. “사하르가 감자냐? 아님 토마토냐? 꽃이 피게” 아이보다 못한 성감수성과 인권에 대한 무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남자를 보며 분노가 치밀었다. 초경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물건 팔 듯 딸을 넘긴 부모와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어린 신부를 맞이하는 성인 남자 사이에서 사하르는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하지만 누구도 아이의 외침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랜 내전으로 인한 빈곤과 여성의 인권을 무시하는 이슬람의 관습이 맞물려 죄 없는 어린 아이들이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는 현실은 지옥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가버나움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영화 <가버나움>속에는 기적을 행하는 예수가 없다. 누구도 병을 고쳐주지 않고 먹을 것을 나눠주는 사람도 없다. 힘없는 사람의 약점을 잡아 돈벌이를 하고 어린아이에 불과한 딸을 짐짝 처분하듯 시집보내는 냉담한 부모가 있을 뿐이다. 전쟁과 폭력, 빈곤과 불평등을 야기한 주체는 힘있는 권력자들이지만 피해는 언제나 힘없는 약자들의 몫이다.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의 부조리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여성과 아이들의 삶을 바라보는 심정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영화 속 배우들은 감독이 직접 연기한 변호사 나딘을 제외하면 모두가 실제 난민들이었다. 자인역의 배우는 시리아 난민으로 베이루트 시장에서 배달일을 하다가 캐스팅 되었다. 어려운 환경 탓에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 12살인데 이름도 쓰지 못했다. 여동생 사하르 역을 맡은 아이는 거리에서 껌을 팔다가 캐스팅되었다. 촬영 도중 배우가 체포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배우들은 다른 누군가를 연기하거나 흉내낼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기만 하면 됐다. 영화 속 현실이 곧 자신들의 삶이었고 주인공의 아픔과 고통을 이미 경험했기에 타인을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가버나움>란 영화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이유다.



칸 영화제에 참가하기 일주일 전까지 배우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줄 신분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영화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세계인들의 가슴 속에 레바논의 현실을 각인시켰다. 영화를 통해 이들은 마침내 존재증명에 성공했다. 감독은 영화적 성과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수익금으로 가버나움 재단을 만들었고 난민 배우들을 도왔다. 라힐 역을 맡은 배우는 희망대로 케냐로 돌아갔고 자인은 노르웨이에 정착해서 학교를 다니며 비로소 열두살다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영화 상영 후 이어진 15분간의 기립 박수는 시나리오나 연출로도 이끌어 낼 수 없었던 난민들의 비극적인 삶을 훌륭하게 그려낸 배우와 감독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영화가 끝나면 배우로서의 역할도 끝난다.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연기라는 한바탕 꿈에서 깨고 나면 막막한 현실이 배우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그들에게 관객들은 기립 박수로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동안 난민문제는 뉴스의 국제면에서 간간히 다루어지는, 나와는 별 상관없는 추상적인 이슈에 불과했다. 공허한 눈빛과 표정을 지운 아이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비로소 전쟁 같은 삶을 이어가고 있는 아이들을 느낄 수 있었다. 여동생을 돌보고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며 극한 상황에서도 요나스를 품어준 자인의 행위는 오랜 옛날 가버나움에서 기적을 행한 예수를 닮았다. 저주받은 땅, 혼돈의 도시에서도 감독은 희망의 메시지를 놓지 않았다.



시리아는 2011년 4월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반란군과 정부군의 충돌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어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종교 분쟁으로까지 치닫게 되어 주민들은 요르단, 레바논, 이라크, 터키 등지로 피난을 떠났다. 유엔아동기금(UNICEF)은 시리아 내전으로 6년간 1만 7천 400여명의 어린이들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자인의 환한 미소가 사라진 후에도 오랫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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