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사슬, 자물쇠, 쇠막대기, 글루건,,,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이 도구는 어리고 연약한 9세 여아를 학대하는 데 사용된 물건이다. 지난달 29일 창녕군의 한 편의점 앞 도로에서 잠옷 차림으로 도망치듯 뛰어가다가 이웃 주민의 신고로 발견된 아이의 온몸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머리는 찢어져 피를 흘린 흔적이 있었다. 손가락에도 화상을 입어 손톱 일부가 빠져 있는 등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처가 아이 몸에 나 있었다. 아이는 쇠사슬이 목에서 풀린 틈을 타 베란다 난간을 통해 탈출했다.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창녕 아동 학대 사건에서 계부와 친모는 상상을 초월한 방법으로 아이를 학대했다. 아무리 상상력을 쥐어짜도 쉬 그려지지 않는 학대, 아니 고문 장면을 연출한 주범은 남이 아닌 피를 나눠준 부모였다.
이 사건을 보며 오래전에 봤던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04년 작품 <아무도 모른다>이다. 1988년 일본 도쿄에서 일어난 ‘스가모 어린이 방치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영화를 본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도쿄의 변두리 한 작은 아파트에 아들 하나를 둔 젊은 엄마가 이사를 온다. 곧이어 이삿짐을 풀자마자 캐리어 속에서 두 명의 아이가 튀어나오고 나머지 한 아이도 조금 있다가 이사한 집으로 조용히 합류한다.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물을 테지만 이 집의 아이는 넷이고 아버지는 모두 달랐다. 아이가 많으면 이사가 쉽지 않아 큰 아이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의 존재는 숨기고 이사를 했다. 황당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엄마는 아이들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고 학교에도 보내지 않는다. 집주인에게 들키면 안 되기 때문에 바깥 외출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네 명의 아이들은 서로 의지 하며 좁은 집 안에서만 살아간다. 어느 날 ‘크리스마스 전에 돌아오겠다’는 쪽지 하나만 달랑 남긴 채 12살인 장남 아키라에게 동생들을 맡기고 엄마가 사라진다. 새로 만난 남자 친구와 살기 위해서였다.
영화는 엄마가 떠난 뒤 세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방치된 채로 살아가는 네 남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존재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네 아이들의 이야기는 영화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실제는 더 참혹했다고 한다.
오지 않는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아이들은 점점 지쳐간다. 돈이 떨어지고 수도와 전기마저 끊기자 집 안에서만 버틸 수 없었던 아이들은 근처 공원에서 옷을 빨고 식수를 해결한다. 살뜰하게 동생들을 챙긴 장남 아키라는 책임감의 무게에 점점 짓눌리고 아버지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아키라의 눈빛은 초점 없는 눈으로 바뀐다.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삶에 지친 아이는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아이를 방치한 엄마의 잘못도 물론 크지만 아이는 혼자 낳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엄마의 남자 친구들은 하나 같이 책임을 회피한다. 육아에 대한 책임이 양쪽 부모 모두에게 있음에도 사회는 여전히 여성이 그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 온전히 미혼모가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 결국 방치된 아이들에게 사고가 일어나고 막내 유키가 사망한다. 이사 올 때 캐리어에 실려 온 유키는 떠나는 길에도 캐리에 실려간다. 채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린 꽃처럼 그렇게 세상을 떠난다.
창녕 사건에서 아이는 스스로 집을 뛰쳐나오기까지 누구도 학대를 눈치채지 못했다. 영화에서도 아이들이 방치된 것을 충분히 눈치챌 수 있는 장면이 나오지만 어른들은 굳이 끼어들려 하지 않는다.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챙겨주는 편의점 직원은 아키라에게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라는 말만 할 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세를 받으러 온 집주인이 아이들만 남은, 도저히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집안 상태를 확인 하지만 그녀 역시 아이들의 삶에 개입하는 걸 꺼린다. 초라한 아이들의 행색을 조금만 눈여겨봤다면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도 하지 않았다. 삶이 각박해지면서 이웃에 누가 사는지 조차 모르는 것이 당연시되어버린 사회에서 도움을 청할 수 없는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의 삶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아동 학대의 70~80%는 가정에서 일어난다. 언뜻 이해되지 않는 통계지만 가해자는 대부분 가족 구성원이다. 가장 안전한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가정이 실상은 가장 위험한 공간이 셈이다. 예로부터 남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것이 미덕이라 여겨온 문화와 ‘내 자식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정서가 학대를 방조한 셈이다.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처벌을 정당화 것도 문제다. 훈육과 학대도 분간 못하는 부모는 아이에게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치유하기 힘든 정신적 상처를 주게 된다.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엄연한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다.
가족이니까 다 이해하고 가족이라서 모든 허물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하지만 실상은 가족이라서 더 모르기도 하고 가족이 질긴 족쇄가 되기도 한다. 핏줄로 연결된 가족이 주는 상처는 오히려 더 아프고 힘들다. 타인이 주는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회복이 되지만 가족에게 받은 상처는 평생 그 사람의 삶을 좀먹는 고통이 되는 이유다. 걸어 잠근 문 안에서 영문도 모른 체 학대당하고 있는 아이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사회적 안전망을 좀 더 촘촘하게 짜야한다.
부모는 자신을 버렸고 돈은 떨어지고 동생의 죽음까지 맞은 아키라는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언제까지나 장남의 책임감만으로 삶을 지탱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