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틸 라이프>
예전에는 혼자 산다는 것이 직장이나 학업 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생활방식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혼밥, 혼술, 혼영(영화), 혼행(여행) 이란 말이 더 이상 낯선 단어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우리 사회의 1인 가구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1인 가구 중에는 개인이 선택한 화려한 싱글도 있지만, 직장을 구하기 위해 홀로 낯선 도시로 이사 온 사람,
이혼이나 사별 등으로 인한 가정해체나 가족 상실로 인해 홀로 남겨진 사람들, 비싼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해 철새처럼 떠돌아다녀야 하는 도시 유목민도 있다.
최근에는 비혼 인구가 늘어나면서 한 번도 가정을 꾸린 적이 없는 인구 층 또한 늘어나고 있다.
현재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30%를 바라보고 있다.
1인 가구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주된 가구 유형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통계다.
이제는 혼자서 술을 마시거나 밥을 먹는 것이 더 이상 청승맞거나 남의 시선을 의식해야 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혼자서 여행하고 혼자서 영화를 보며 개성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은
다양한 삶의 방식 중 하나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평균수명이 늘면서 고령화가 심화되고 있는 것도 1인 가구 수가 늘어나는 원인 중의 하나이다.
혼자서 살다가 아무도 모른 채 홀로 죽음을 맞이하고 시신은 죽은 뒤 한참 뒤에서야 발견되는 죽음이 있다.
일명 고독사이다. 얼마 전 한 여배우의 고독사가 알려져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혼자 살던 이 배우는 동생에 의해 오피스텔에서 숨진 지 2주 후에야 발견되었다고 한다.
1인 가구의 증가로 인한 고독사가 저소득층의 문제 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로 떠오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거나 길을 걷다 보면 지팡이에 의지해 힘겹게 걸어가는 노인들을 만날 때가 종종 있다.
이들 옆에는 아들이나 딸, 혹은 손자나 손녀로 보이는 어느 누구도 없었다.
마치 한겨울 나목처럼 노인들은 저마다 한 보따리의 외로움을 품에 안고 걸어가고 있는 듯했다.
삶과 죽음은 빛과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고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죽음을 피할 길은 없다.
하지만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외롭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영화 <스틸 라이프>의 주인공 존 메이는 22년 차 공무원이다.
고독사 한 사람이 발견되면 찾아가서 유품을 정리하고 지인들을 수소문해 연락을 취한 뒤
장례를 치러주는 업무를 담당한다. 그는 시신이 화장된 후 한 줌의 재로 변하는 그 순간을 지나
납골당의 유골 보존기간 만료일까지, 기대를 버리지 않고 끈기 있게 지인들의 연락을 기다린다.
덕분에 상사로부터 일 처리가 늦고 비효율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한다.
기다림 끝에 어렵사리 연락이 닿은 망자의 지인들을 장례식에 초대해 보지만, 대부분은 거절당한다.
결국 텅 빈 성당에서 존 메이만이 홀로 고인의 마지막을 지킨다.
어느 날 고독사 한 할머니의 집을 방문한 그는 그녀의 집을 둘러보고 유품인 목걸이, 립스틱, 사진 등을 챙긴다. 가족이나 지인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그녀를 기억하지 않았다.
고양이 ‘수지’ 만이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결국 장례를 치를 날이 다가왔고 추도사를 위해 펜을 든 존은
그녀만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추도사를 준비한다.
그녀는 세계평화를 찾은 1945년의 여름
포드 부부의 외동딸로 태어나
혼란스러운 시기에 예고 없이 찾아온
귀한 사랑의 결실로 부모의 기쁨이 됐습니다
작은 즐거움에도 감사하는 자세로
맑은 날 해변의 온기와 소박한 목걸이와
립스틱 하나에도 기뻐했습니다
플라멩코 댄스를 각별히 좋아하여
붉은 드레스를 입고 멋진 춤을 뽐내기도 했습니다.
황혼엔, ‘수지’라는 고양이를 돌보며
맑은 날을 함께하며 즐거운 성탄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죽음과 함께 그녀의 삶도 땅 속 깊이 매장될 뻔 했지만 존 메이의 추도사를 통해 한 여인의 인생이 아름답게 부활했다.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혼란의 시기에 그녀는 태어났다.
전쟁 중에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했던 부모의 사정이 얼마나 절박했을까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혼란 속에서 뜻밖에 주어진 생명의 선물로 인해 그녀가
부모에게 큰 기쁨이 되었으리라 상상했다.
그녀가 사용했던 흔한 립스틱과 목걸이는 소박한 삶의 징표로 돌아왔고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그녀는 플라멩코에 빠진 열정적인 댄서였다.
마치 딸에게 보내는 듯한 성탄 엽서를 보고 반려묘 수지와 함께 즐거운 성탄을 보내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다.
초라한 유품이지만 유품을 단서로 고인의 삶의 흔적을 한 조각, 한 조각 모아서 그녀의 인생을 새롭게 직조했다. 그는 작은 목걸이, 보잘것 없는 립스틱 한 개에서도 고인의 삶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삶이었지만 이 또한 의미 있고 소중한 삶이었음을 그는 기어코 얘기하려 했다.
텅 빈 성당에서 울리던 추도사는 비록 홀로 죽음을 맞았지만 그녀의 마지막 길이
결코 외롭고 쓸쓸하지 만은 않다는 위로를 건넨다.
집과 구청을 오가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존 메이의 생활은 자로 잰 듯 정확하다.
매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일을 하고 간소한 식사를 하는 그는 아무도 없는 작은 아파트에서 홀로 산다.
그의 삶은 매일매일의 반복일 뿐 변화는 거의 없다.
충직한 공무원으로 성실하게 일을 했지만 관리자의 눈에 비친 존 메이는 지나치게 융통성이 없고 비효율적이다. 고독사 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무연고자이므로 대충 처리하면 될 일을 시간을 끄는 그가 못마땅하다.
결국 상사는 ‘추천서는 잘 써 줄게’라는 한 마디 말과 함께 그를 해고하기에 이른다.
매사에 무덤덤한 존은 해고도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다만 마지막 맡은 사람만은 처리하고 떠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해서 3일간의 시간을 얻게 된다.
평소와 달리 존 메이는 적극적으로 그의 마지막 의뢰인, 빌리 스토크의 흔적을 찾아 나서기로 한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삶을 살다 간 빌리에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지만
존은 끈기 있고 침착하게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간다.
사금파리처럼 작은 인연 한 조각이라도 빌리의 삶과 이어져 있다면 누구든 찾아가서 이야기를 듣고 장례식에 참석하도록 부탁했다.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노숙자였고 알코올 중독으로 생을 마감한 빌리였지만 한때는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회사의 부당한 처사에 항거한 노동자였고 군인이었다.
녹록치 않은 삶의 부침을 겪으며 평범하지 않은 삶의 이력서를 채운 그는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다양한 인생 이력을 갖고 열심히 살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아무런 연관도 없는 빌리를 위해 애쓴 존의 무조건적인 관심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기억 저편에서 잊혀졌던 빌리의 삶을 다시 소환한 존의 노력으로 많은 이들이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 다시 모였다. 산 사람을 위한 장례식이 아닌 온전히 고인이 주인공인 장례식을
준비한 존은 망자가 얼마나 가치 있고 사랑받을 만한 존재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애썼다.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해도, 부를 일구거나 영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했더라도
그 사람의 인생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음을 존은 알고 있었다.
빌리의 삶이 존의 일상 속으로 들어오면서 단조롭던 그의 삶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직장에서는 비록 해고되었지만 옷차림이 바뀌고 여자와 데이트 약속도 잡는다.
무미건조했던 그의 생활에 변화와 활력이 피어나고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이 펼쳐지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다.
갑작스러운 급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화면이 암전 된다.
심장이 쿵할 만큼 깜짝 놀랄 반전이다.
교통사고가 존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인생이 언제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당혹스러운 결말 앞에 잠시 망연자실해졌다.
하지만 이 또한 삶이고 운명인 것을...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속수무책인 인간이지만 이 또한 인생임을....
영화는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충분히 가치 있다’라고 위로하며 삶의 종착역에서 품격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어렵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일임을 말해준다.
존의 장례식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장례를 치러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 둘 무덤가로 모여든다. 자신의 삶을 기억해준 존 메이를 잊지 않고 찾아준 망자들이다.
삶의 아이러니 앞에서 잠시 망연자실했지만 존 메이의 삶 역시 충분히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인생이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영화 ‘스틸 라이프(Still life)’의 우베르토 파솔리니 감독은
“한 사회의 품격은 죽은 이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라고 했다.
지위와 직업, 물질적 성공을 기준으로 그 사람의 인생을 판단하고 삶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비록 역사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더라도, 기구한 사연을 간직한 채
홀로 쓸쓸히 마지막을 맞이했더라도 모든 이의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빛나는 삶이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 자유롭게 살고 싶지만, 고독하고 외롭게 죽고 싶지는 않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누군가의 삶을 산자들의 기억 속으로 다시 불러들인 존 메이,
그는 생에 대한 예의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인생’ 임을 자각하게 해 준 영화, <스틸 라이프>는
톱밥처럼 섞이지 못하고 쓸쓸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건네는 잔잔한 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