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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May 09. 2018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

- 부조리한 사랑의 방정식 -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한 영화입니다


'모든 통조림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면, 내 사랑의 유효기간은 만 년으로 하고 싶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에 나오는 대사이다. 하지만 실제로 사랑의 유효기간은 생각만큼 길지 않다. 뇌의학적으로도 길어야 3년이라고 한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의 은수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상우를 부담스러워하며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당황한 상우는 은수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항변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은 변한다.     


드레이크 도리머스 감독의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는 미국 남자 제이콥(안톤 옐친)과 영국 여자 애나(펠리 티시 존스)의 뜨거웠던 사랑이 식어버리는 과정,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는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대학에서 같은 강의를 수강한 인연으로 사랑에 빠진 두 사람. 영화의 제목처럼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진 이 커플은 비자가 만료되면서 애나가 영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하지만 사랑에 눈이 먼 연인은 현실의 문제를 가볍게 무시하기로 한다. 비자기간이 만료되었지만 법을 지키지 않고 미국에 남아 둘 만의 달콤한 연애를 즐긴다. 이들의 경솔한 행동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둘의 관계에 발목을 잡게 된다. 금기를 어긴 어리석은 행동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리란 걸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당시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불법체류로 인해 애나는 미국으로 재입국이 거부당하고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벽 앞에서 둘은 런던과 LA에서 각자의 삶을 이어간다. 애틋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면서.

서로의 빈자리는 다른 연인이 대신하기도 하지만 애절함과 간절함으로 가득한 사랑의 추억을 타인이 대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런던과 LA라는 공간의 한계, 함께 할 수 없는 시간의 한계 속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만 같던 사랑의 불씨는 점차 힘을 잃어간다. 물리적 거리는 둘 사이에 건너기 힘든 심연을 만들었고 가구 디자이너와 편집자로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들에게 직장인으로서의 삶 역시 각자의 나라를 벗어나는 것을 어렵게 했다.


하지만 새 연인과의 삶에서도, 지인들과의 대화에서도 이방인처럼 겉도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결국 ‘그(그녀) 여야만 해’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사랑에 빠진 커플은 비자 문제가 해결되고 결혼을 하면 둘 사이를 가로막았던 모든 장벽이 사라지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들이 마주한 현실은 생각과는 달랐다.


장밋빛 미래 대신 예전 같지 않은 냉랭함이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랑이 저무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랑의 싹이 움튼 봄날, 열정으로 가득했던 찬란한 여름이 지나면 일상의 권태가 낙엽처럼 쌓이는 가을이 온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메마른 감정만 위태롭게 매달린 겨울을 향해 사랑의 사계절은 저물어 간다.

마치 인간의 생로병사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었고 예정된 수순이었다.  


  

저무는 사랑을 지켜보는 일은 애잔하고 쓸쓸했다.

벌어진 사랑의 틈을 메워보려는 듯, 샤워를 마친 제이콥과 애나는 서로를 포옹한다. 하지만 사랑의 온도는 이미 차갑게 식어버렸다. 미칠 듯이 사랑했던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지만 둘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공허하다.


영화 속에는 제이콥과 애나의 또 다른 연인 사이먼과 사만다가 등장한다. 이들의 사랑은 ‘인내’하는 사랑이다. 제이콥이 애나를 잊지 못해서 사만다와 교제 중에 실수로 자신을 애나로 불러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도 늘 그 자리에서 사만다는 제이콥을 기다려준다. 위스키보다 샴페인을 권하고 술을 줄이라고 충고하는 사이먼의 사랑 역시 열정보다는 안정적인 사랑에 가깝다. 사이먼과 사만다가 사랑하는 방식은 인내하고 기다려주는 사랑이다.     

제이콥이 애나를 위해 만들어준 의자에 새겨진 ‘like crazy’와 애나의 팔찌에 새겨진 ‘Patience’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미칠 듯한 사랑은 인내하는 여유가 없고, 인내하는 사랑은 다소 밋밋하게 느껴진다. 애나의 팔찌가 부러진 것처럼 제이콥과 애나의 사랑에는 인내가 부족했고 사이먼과 사만다의 사랑에는 불꽃 튀는 열정이 없었다.     


어떤 사랑이 정답일까? 영화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고 오로지 관객의 몫으로 남겨둔 채 끝난다. 인내와 열정이 하모니를 이룬다면 영원한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인내와 열정이 한 배를 타는 건 가능한  일일까?


한 사람의 생애가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고 해서 의미 없는 생이 아니듯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가슴 시리도록 사랑했던 기억은 밤하늘의 별처럼 영롱하다. 저무는 사랑이 비록 예정된 운명일지라도 기꺼이 사랑을 선택하는 열정은 그래서 무모할지라도 아름답다.     


정열적인 사랑 끝에 남는 것은 한 줌의 재뿐임을 알지만 미친 사랑이 손을 내밀어 온다면 또다시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없을 것이다.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천형처럼,  부조리한 사랑의 방정식은 영원히 풀 수 없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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