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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May 17. 2018

영화 <트립 투 스페인>

- 삶의 모습은 어디서나 비슷하고 누구나 조금씩 닮아있다 -

* 브런치 무비 패스로 사전 관람한 영화입니다


소설가 김훈의 산문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의 첫 문장은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로 시작된다.

물리적 시간에 비추어 보더라도 나의 중년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난감해지는 건 비단 소설가뿐만은 아니리라.


삶의 변곡점을 지난 중년 남자들의 삶 속에는 더 이상 ‘새로움’이나 ‘희망’과 같은 단어가 들어설 자리가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영화 <스페인 투 트립> 속의 두 중년 남자는 조금 다르게 얘기한다. 


“이 순간을 즐겨야 돼. 50대는 인생의 황금기잖아.” “우린 잘 익은 과일이지만 매달려만 있으면 말라죽어. 떨어져야지, 누가 따 가든가.”     


이탈리아와 영국을 정말 정복한 두 남자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이 세 번째 여행을 떠난다. 정열과 낭만이 공존하는 나라 스페인이다. 이곳에서 둘은 마치 돈키호테와 산초처럼 곳곳을 누비며 먹고, 마시고 즐기며 음식과 인생, 사랑에 대한 맛깔난 수다를 한 상 가득 차려낸다.      


두 남자의 여행은 일반적인 여행과는 조금 달랐다. 누구나 아는 유명한 관광지도, 순례자들의 성지 산티아고 길도 이정표를 스치고 지나친다. 알함브라 궁전이 있는 그라나다와, 소설 <돈키호테>의 무대가 된 콘수에그라, 말라가 정도가 그나마 알려진 여행지이다.


롭과 쿠건, 유쾌한 두 남자의 여행 목적은 관광이 아니라 수다인 듯 중년 아재들의 수다 배틀은 시종일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실제 이름을 똑같이 사용하고, 하는 일도 그대로 영화 속에 담았다. 유명인들의 성대모사를 비롯해서 공연, 방송, 영화 이야기 등이 쉴 새 없이 화제에 오르고 미식의 천국 스페인 요리와 어우러진 수다는 미각과 시각, 청각 모두를 자극한다. 서로의 커리어에 대해 때로는 농담을 던지듯, 때로는 냉철한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자처하지만 이를 담백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서로를 배려하고 인정하는 두 친구의 우정을 가늠케 한다.


젊음과 나이 듦, 삶과 사랑에 대한 유쾌하지만 가볍지 않은 수다는 삶의 연륜이 담겨 있어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 못지않게 누구와 함께 하느냐 또한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스티브와 쿠건은 환상의 커플이었다.     



한바탕 수다와 함께 낮의 여행이 끝나면 밤이 찾아오고 롭과 스티브는 방으로 돌아간다. 여행의 환상에서 깨어나 각자의 삶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어린 아들의 울음소리에 훌쩍 떠난 여행이었지만 두고 온 가족과 영상통화를 하는 롭의 모습, 연애와 일, 자식까지, 어느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는 스티브. 두 남자의 모습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면 하는 타인의 삶 만은 아니었다.


삶의 모습은 어디서나 비슷하고 누구나 조금씩 닮아있다.  
일상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떠나온 여행지에서도 삶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50대는 인생의 황금기라고 거침없이 말했지만 이 남자의 주변에도 그림자는 따라다니고 있었다. 신인 작가에게 밀려난 스티브는 꿈속에서 오스카 상을 수상하며 좌절된 현실의 꿈을 보상하려 한다. 꿈이라는 판타지를 통해 일상의 결핍을 보상받고 위로받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다. 혼곤한 잠 속에서 악몽에 시달리고 엉킨 실타래마냥 쉽게 풀리지 않는 삶의 숙제 앞에서 낮은 비명을 지르는 모습은 결코 낯설지 않다.    


실제 배우의 실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영화는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가 모호하다. 잠시 일상의 짐을 벗어두고 떠나왔지만 도착한 여행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의 장이다. 여행과 일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다. 여행은 일상의 확장이었고 꿈속 판타지도 현실의 벽을 넘어서기는 어려웠다. 영화와 현실, 여행과 일상이 구분되지 않듯이 삶 또한 명확한 경계설정이 어려운 건 아닐까. 생활을 내려놓고 삶을 위해 떠난 여행이었지만 두 남자의 중심에 놓인 건 음식이나 문화가 아니라 인간관계와 삶의 무게였다.     


갑옷차림에 조랑말을 타고 풍차 앞에 선 스티브와 롭의 모습은 돈키호테와 산초로 완벽하게 빙의한 듯 보였다. 롭은 육아에 지쳐서 여행을 선택했지만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고 가족을 위해 좋은 제안도 포기할 줄 아는 남자다. 반면 스티브는 작품에 대한 고집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자존심 세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인물이다. 적당히 꼰대 냄새를 풍기는 스티브의 모습은 어딘가 익숙하고 그래서 친밀하게 느껴진다.     


이상과 현실의 극단에 있던 산초와 돈키호테가 서서히 서로를 닮아가듯 롭과 스티브도 여행이 끝나면 조금 더 서로에게 가까이 가 있지 않을까. 현실과 타협할 줄 아는 롭이 무모한 스티브가 되고 이상주의자 스티브는 어느덧 현실주의자 롭을 닮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하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는 돈키호테의 꿈을 아직도 로망으로 간직하고 있는 나는 그를 닮은 스티브의 무모함을 응원하고 싶다.     


비록 스티브의 또 다른 고난이 예고되어 있을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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