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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Feb 17. 2019

<플로리다 프로젝트>

- 닿을 수 없는 꿈과 환상의 세계 -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션 베이커 감독 작품으로 2018년 3월 국내에서 개봉된 작품이다. 귀여운 세 아이들과 보랏빛 색감이 풍기는 행복하고 달콤한  포스터 이미지와 달리 영화 속 세상은 장밋빛이 결코 아니었다. 


어쩌다 미혼모가 된 헬리는 딸 무니와 둘이서 산다. 꿈과 환상의 세계로 상징되는 디즈니 월드 주변 홈리스들의 임시거처인 모텔 '매직 캐슬'이 그녀의 보금자리이다. 헬리는 바람직한 부모의 모습과는 한참 거리가 멀어 보인다. 마리화나를 피우고 거친 욕을 하며 온 몸은 문신으로 빈틈이 없다. 철딱서니 없는 모습은 엄마라기 보다는 차라리 언니에 가깝다. 하지만 무니에게 나름 최선을 다하며 엄마로서의 책임을 저버리지 않는다. 아이 눈높이에 맞춰 대화하고 힘들어도 크게 내색하지 않고 즐겁게 살려고 노력한다. 미래가 불투명하고 방세를 벌기 위한 노동은 힘겹지만 타인의 비난으로부터 딸을 보호하려 애쓰고 함께 비를 맞고 함께 불꽃놀이를 보며 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무니의  친구 젠시의 거처는 또 다른 모텔 '퓨처 랜드' 다. 젠시는  감옥에 드나드는 엄마를 대신해서 할머니 밑에서 크고 있다. 젠시의 할머니는 비록 보잘것 없는 좁은 방이지만 아름답게 꾸며서 안온한 분위기 속에서 손녀를 키우고자 애쓴다. 무니의 또 다른 친구 스쿠티는 헬리의 친구, 애슐리의 아들이다. 이들  꼬마 3인방은 하루 종일 모텔 주변을 돌아다니며 말썽을 일으키고 관광객을 속여 아이스크림을 얻어 먹기도 한다. 덕분에 아이들 뒤치닥거리하느라  모텔  매니저 바비는 늘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그는 월세를 독촉하고 사고 수습을 위해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를때도 있지만 실상은 어려운 처지에 몰린 헬리를 모른채 하지 않는, 마음이 따뜻한 남자였다. 


일자리를 알아보고 길거리에서 불법 영업을 하며 생계를 위해 힘겹게 뛰어다니지만 모녀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궁지에 몰린 헬리는 결국 선을 넘는 행위를 저지르고 만다. 엄마가 남자를 받는 동안 욕실에서 어린 무니 혼자 목욕을 하며 인형들과 대화하는 장면은 그래서 무척이나 서글프게 다가온다.  누군가의 신고로 결국 무니는 엄마와 헤어져 아동보호국 직원들에게 넘겨지게 된다. 무니는 엄마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 보호국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며 완강하게 버티지만 무니가 맞닥뜨린 현실은 냉혹했다.  결국 친구인 젠시에게 뛰어 간 무니... 


그동안 잘 참았던 무니는 친구 앞에서 결국 무너지고 만다. 설움에 북받쳐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친구에게 이별을 고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울음 때문에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다.  울고 있는 무니의 손을 잡은 젠시는 바로 옆에 살고 있으면서 한 번도 갈 수 없었던 디즈니 랜드로 힘차게  뛰어간다. 부모의 손을 잡고 행복한 나들이를 즐기는 아이들 옆을  지나쳐서 꿈과 환상의 세계를 향해 뛰어갔다. 누군가에게는 행복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었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결코 닿을 수 없었던 잔인한 꿈의 세상으로...


아름답고 멋진 신세계 디즈니 랜드와 그 주변의 빈민가(?) '매직캐슬'과 '퓨처랜드'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미국사회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관객은 영화가 던지는 질문앞에 놓이게 된다. 자격없는(?) 엄마 밑에서 자라는 무니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나서서 엄마와 아이를 떼어 놓으려고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물음이다. 무니가 경제적으로 고통 받을 때 국가는 결코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사지에 몰린 그녀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자 '부적절한 엄마' 라는 꼬리표를 단 뒤 '널 좋은 곳으로 데려 갈거야'라는 무책임한 말로 무니를 엄마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한다.


어떤 이들을 간편하게 규정하고 쉽게 배제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폭력이다. 자신의 존재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사회의 잣대로 규정되는 존재는 그래서 슬프고 억울하다. 한 인간이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어야 한다. 한 사람의 온당한 몫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궁극적인 힘은 사랑이다. 사랑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다. 그래서 하나일 때 보다는 둘 일 때 좀 더 좋은 사람, 좀 더 온전한 개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헬리와 무니가 서로의 결여를 조금씩 채워가며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을까? 영화는 거기까지는 말해 주지 않는다. 


잘 만들어진 영화나 소설은 인물을 평면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척 보면 아는'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영화는 타인이란 한 번 보면 대충 파악할 수 있는 쉬운 존재로 본다는 시각이 깔려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복잡하고 섬세한 내면과 그 미세한 결을 따라가는 일이 얼마나 녹록치 않는 일이란 것을 잊어 버리지 않는다면 결코 게으르게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아역 배우들의 놀랄만한 연기, 노련한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 덕분에 한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어려운 작업을 조금은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인간의 삶에는 반복되는 근본 물음이 있고 좋은 영화는 그 곳을 향해 예리한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결코 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질문은 간절하게 묻는 것 만으로도 인생을 조금 나아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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