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인 마음여행자 Jun 22. 2018

무수한 A들이 '꽃'으로 불려지는 세상<여중생 A>

-  무수한 A들이 '꽃'으로 불려지는 세상이 되길 -

** 브런치 무비 패스로 다녀온 영화입니다


이젠 기억조차 희미한 까마득한 옛 일이 되어 버렸지만 나에게도 분명 여중생이었던 시간이 있었다. 부모와는 거리를 두고 싶었고, 친구들과는 좀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망 속에서 줄다리기하며 자주 상처를 받곤 했던 사춘기의 문턱에 선 내 모습이 떠올랐다. 어른의 세계에 속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아이의 세계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나 주변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직은 모든 게 서툴기만 한 중학생이 견뎌내기엔 결코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얼굴은 웃고 있어도 속은 곪은 상처로 욱신 거릴 때가 자주 있었다.    

 

사춘기 아이의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는 큰 화두는 단연 친구다. 하지만 내성적이었던 나는 먼저 다가가는 법을 알지 못했고 지나친 수줍음은 관계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당시에는 드러내 놓고 왕따를 당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풀지 못하는 숙제 앞에서 어느 순간 나는 스스로를 왕따 시키고 있었다. 공부만 잘 하면 존재가치가 저절로 드러나던 초등학교와는 달리 사춘기 아이들에게 성적과 존재가치는 더 이상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없었다. 하루아침에 루저가 되어 버린 듯한 당혹함과 상실감은 꽤나 컸던 모양으로 어린 나이지만 사회의 냉혹함을 조금은 깨닫기 시작한 시점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다행히 한 두 명이지만 친한 친구들과 함께 하면서 중학교라는 낯선 환경에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맞닥뜨린 또 다른 세상에서 이방인이 된 듯한 괴리감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를 괴롭혔다. 관계 맺기에 서툴렀던 여중생 C는 바로 내 모습이었고 영화 속 여중생 A의 다른 이름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미래는 반에서 왕따다. 반 아이들은 폭력적인 아버지를 둔 미래를 패드립(가족흉을 보는 청소년들 사이의 은어)하고 미래의 의자 위에 몰래 분필가루를 뿌려 놓기도 했다. 화장실 문을 밖에서 잠가 버리고 물을 퍼붓는가 하면 체육시간에는 짝이 될 여학생이 없어서 매번 남학생과 짝을 해야 하는 처지의 아이다.      


하지만 미래에게도 탈출구는 있다. 좋아하는 게임 ‘원더링 월드’에 접속할 때와 소설을 쓸 때이다. 학교를 마치면 집으로 달려가 컴퓨터를 켜고 게임을 시작한다. ‘원더링 월드’의 가상현실 속에서 길드를 조직하고 함께 사냥하면서 우정을 나누는 일에 미래는 푹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폭력도 없고, 차별도 없는 판타지의 세계에서 미래는 잠시나마 위로를 얻지만 그 순간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한다.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오면 미래는 다시금 지옥같은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거칠게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아빠를 피해 미래는 옷장 속으로 숨고 아빠가 다시 집을 나갈 때까지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인 채 공포와 싸워야 한다. 시간이 흐르고 소변을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된 미래는 결국 옷장 속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견뎌야 하는 현실은 사춘기 소녀의 여린 감성을 무참히 짓밟았다.     


교실에서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없는 미래는 도서관에서 사서 일을 하며 책을 읽는다. 비록 좁은 공간이지만 책과 함께 하는 시간만은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고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었다. 또 틈틈이 소설을 쓰며 미래는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소설 속에서 A는 여우와 우정을 나눈다. 현실의 미래와 마찬가지로 A도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며 매 순간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내 소설 속에서는 누구도 다치지 않을 거야’라는 의지를 내비치며 미래는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A의 운명은 미래에게 달려 있었고 미래는 현실에서 희망을 찾아야 했다.  


생리대 살 돈이 없어서 아버지한테 사정을 해도 돌아오는 건 무자비한 폭력뿐인 미래, 부모의 이혼과 재혼으로 관심 밖으로 밀려난 재희. 오로지 성적만이 중요한 가치라고 여기는 부모 밑에서 공부를 못하면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는 백합. 미래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른 아이들도 저마다의 삶의 무게에 힘겨워했다. 아이들의 삶 역시 어른들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영화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민낯을 그대로 비추어 주었다.    


미래에서 마음을 열고 다가왔던 백합은 미래의 소설을 베껴서 공모전에 제출한다. 미래가 몰래 짝사랑하고 있는 태양은 백합에게 사랑을 고백해서 미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공모전 사건이 밝혀지자 미래와 백합 사이를 질투하던 노란이는 왕따의 대상을 이제 백합에게로 옮긴다. 이어서 눈치 없고 맹한 안경 소녀에게로 왕따의 바통은 또다시 이어진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는 다시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이 그대로 되풀이되는 모습이다.    


어느 날 ‘원더링 월드’가 서비스 종료를 알려오고 더 이상 판타지 속에서 위로를 찾을 수 없게 된 미래는 길드 멤버 희나가 알려준 어디론가에서 프리 허그를 하고 있는 재희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재희 역시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예전에 친구를 왕따 시킨 죄책감으로 그 친구를 찾기 위해 프리허그 이벤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왕따의 가피해자라는 극단에 놓여 있었지만 마음의 고통은 다르지 않았다. 서로의 상처를 알아봐서였을까? 말없이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재회를 만나며 미래는 마음의 위로를 받게 되고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 간다. 둘은 버킷 리스트를 공유하며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날을 함께 준비한다.  

   

소설 속에서 여우를 떠나보낸 A는 의젓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현실의 미래도 백합이 자신의 상처를 돌봐준 기억을 상기하며 왕따를 당하는 백합 이를 도와준다. 버킷 리스트를 공유하며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준 재희 덕분에 미래도 조금씩 희망을 찾기 시작한다. 프리허그를 통해 친구를 만나고 용감하게 자신의 상처를 직면한 재희는 한 장의 편지를 남기고 아버지가 있는 알래스카로 떠난다.


떠나면서 재희가 남긴 “슬플 땐 울어도 괜찮아”라고  편지를 읽는 순간 미래는 오열한다. 참았던 슬픔과 분노를 모두 담아 한바탕 굿을 하듯 울음을 토해낸다. 재희의 메시지는 미래뿐만 아니라 상처받고, 공감받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였다.     


인생을 게임처럼 리셋하고 소설처럼 지우고 다시 쓸 수 없지만 아직 써 내려가지 않은 미완의 부분은 내가 주인공이다.  미래가 쓰는 소설처럼 삶이란 각자가 쓰는 한 편의 소설이고 작가는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외로운 미래에게 다가와 먼저 손을 내민 백합이, 뒤에서 살며시 옷자락을 잡아준 재희의 마음이 미래의 마음으로 건너와 서로를 연결시켜 주는 든든한 다리가 되었다.
 

아무에게도 관심받지 못한 고통 속에서 암흑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무수한 A들이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려지고 ‘꽃’ 이 되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영화는 말하는 듯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는 착한 아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