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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Feb 18. 2019

<너는 착한 아이>

-어떻게 하면 착한 아이가 될 수 있나요?-

가끔씩 일본 영화를 챙겨보곤 한다. 일본 특유의 감성과 문제의식을 함께 보여주는 영화라면 더욱 좋다. <너는 착한 아이>는 오래전에 다운로드하여 USB에 저장해 두었지만 차일피일 하느라 보지 못한 채 미뤄 두었다. 요즘은 다운 받기 보다는 넷플리스나 왓차 서비스를 주로 이용하는 편이라 운동기구에 앉아서 아이패드를 펼친 채 영화를 봤다.     


영화 속에는 사회적 약자 내지는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소수자들이 등장한다. 치매노인, 장애를 가진 아이, 학대받는 아이들 등. 비단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출장이 잦은 남편을 대신해 혼자서 육아를 도맡아 딸 ‘아야네’를 키우고 있는 ‘미즈키’는 예의 바르고 상냥한 여성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이웃들과 있을 때의 모습일 뿐 집으로 돌아오면 그녀는 무섭게 돌변한다. ‘아야네’가 조금만 잘못해도 아이를 밀치고, 때리고 물건을 던져서 상처를 입히는 등 전형적인 아동학대 가해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학대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고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연약한 아이에게 가하는 폭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간다’는 초등학교 4학년이다. 방과 후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운동장에 남아 있는 것을 담임인 ‘오카노’가 발견하고 대화를 시도한다. 계부가 5시 이전에는 집으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고 했기 때문에 비가 오는 날에도 집에 가지 못한 채 ‘간다’는 운동장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만 했다. 하루 한 끼 학교 급식이 식사의 전부인 ‘간다’는 자신이 착한 아이가 아니라서 산타가 오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계부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묻는다. “어떻게 하면 착한 아이가 될 수 있어요?”라고... 가슴이 먹먹해진 담임교사 ‘오카노’가 반복해서 말한다. “너는 착한 아이야”라고....    


짓궂은 아이들과 학부모의 잦은 민원에 지친 사회초년생 ‘오카노’가 퇴근 후 힘없이 소파에 앉아 있을 때 누나의 부탁으로 조카가 자신을 안아 주려고 한다. 귀찮다고 거부하는 삼촌의 몸짓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이 삼촌의 무릎으로 올라온 아이는 ‘오카노’를 가만히 안아 준 뒤 등을 토닥거려 준다. ‘힘내’라는 말과 함께. ‘오카노’의 눈에 살짝 눈물이 고인다. 누나가 말한다. ‘아이를 예뻐해 주면 아이는 착하게 자라게 되고 세상은 평화로워진다’고. 정답이었다. ‘착한 아이가 되는 법’ 은 바로 이것이었다. 착한 아이가 되려고 애쓴다고 착한 아이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런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부모가 예뻐해 주면 아이들은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고 사랑받은 아이들은 착하게 자란다.   

  

뜻하게 않게 어린 조카에게 위로받은 ‘오카노’는 자기 반 아이들에게 가족 중 누군가에게 안겨보라는 다소 엉뚱한 숙제를 내준다. 웃고 떠들며 장난스럽게 받아들이던 아이들이 숙제를 마친 후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장면을 카메라가 하나하나씩 비춰준다. “마음이 편안했어요” “기분이 이상했어요” “숙제라서 그냥 했어요” 등등 여러 가지 답이 나왔지만 아이들의 표정 속에서 ‘행복’ 또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딸에게 폭력을 휘두른 뒤 딸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혐오로 오열하는 ‘미즈키’, 그녀 역시 아동학대의 피해자였다. 담뱃불에 지진 손목의 상처로 인해 시계로 상처를 가린 후에야 외출을 하는 ‘미즈키’에게도 ‘오오미야’처럼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라고 말해주는 한 사람이 있었다면 학대의 대물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누구나 ‘착한 아이’가 되고자 애썼고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미처 부모가 될 준비가 안 된 어른들은 아이들의 연약한 가슴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만다. 부모도 엄연한 권력이다. 힘의 평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들의 생존권을 부모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을 남용하게 되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어쩌다 어른’ 이 된 우리는 아이 앞에서 완벽한 어른 코스프레를 하지만 실상은 치유가 필요한 상처를 감추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누구나 ‘자녀’인 때가 있었다. 부모가 되었을 때 내가 ‘자녀’ 였을 때의 경험을 소환해서 자주 돌아봐야 내 상처의 앙금이 자녀에게 독이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좋은 부모’가 되는 길은 영화 속 ‘오오미야’처럼 자신이 상처 많은 아이로 자랐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아이 탓을 하기 전에 내 안에 뿌리내린 상처부터 돌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영화 속 ‘간다’의 절실한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착한 아이가 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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