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일 아침 ‘하늘이 맑다’고 말해 줘 -
어쩌다 보니 파리를 세 번 다녀왔다. 그때마다 빠지지 않고 간 곳은 센 강이었다. 그리고 센 강을 갈 때면 무의식적으로 퐁네프 다리가 떠올랐다. 아마도 영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래전 레오 까락스 감독의 ‘퐁네프의 연인들’을 보았다. 당시 보기 드문 파격적인 영화라는 소문에 순전히 호기심으로 보러 간 영화였다. 파리의 퐁네프 다리 위에서 펼쳐지는 러브 스토리라는 얘기를 듣고 낭만적인 파리와, 아름다운 다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남녀 간의 로맨틱한 사랑을 기대하고 간 나는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시력과 함께 생의 의지도 잃어가고 있는 여주인공 ‘미셸’과 삶의 희망을 잃고 수면제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노숙자 ‘알렉스’. 둘의 사랑은 내가 예상했던 이미지의 낭만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영화를 보고 온 사람들 간에 떠돌았던 ‘세상에서 제일 지저분한 커플’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둘의 비주얼은 충격적이었다.
여주인공 ‘줄리엣 비노쉬’는 눈에 안대를 한 채 삶을 포기한 듯 반쯤 정신이 나간 모습으로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고 노숙자 역을 맡은 배우는 실제로 파리 뒷골목이 주거지인 부랑자를 캐스팅 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완벽한 노숙자 행색을 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 배우가 진짜 배우가 맞는지 확인까지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확인 결과 ‘알렉스’는 ‘드니 라방’이라는 아주 뛰어난 진짜 배우였다. 이후에 본 영화 <홀리 모터스>에서 그는 다시 한번 신들린 연기로 나를 감탄시켰다.
영화를 봤던 당시는 아직 어린 나이여서 그랬는지 남녀 주인공의 충격적이고 기괴한 비주얼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극장을 나왔다. 스토리 위주의 할리우드 영화에 익숙해져 있었던 내 정서는 예술성 짙은 프랑스 영화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도 영화 속 강렬한 이미지는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지만 영화에 대한 기억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겨울방학을 이용해 영화 관련 연수에 참여했다가 우연히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날 일정을 마치고 호텔 방에서 노트북으로 다운로드한 영화를 맥주 한 캔과 함께 다시 보았다. 두 번째로 보는 영화는 완전히 다른 영화였다. 예전에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던 첫 장면부터 강렬한 인상으로 나를 사로잡아 버렸다. 첼로 선율 때문이었다.
파리의 지하차도를 빠져나와 센 강을 지나 어두운 파리의 밤거리를 훑고 지나가는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비장미 넘치는 첼로 선율이 흐른다. 코다이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 작품 8]이다. 무반주 첼로 곡을 좋아해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가끔 챙겨 들었지만 영화 속 첼로곡은 처음 접하는 곡이었다. 절제되고 균형 잡힌 바흐의 곡과 달리 코다이의 첼로는 자유분방했고 열정적이었다. 바흐가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이라면 코다이는 우수어린 광기로 가득한 반항아였다. 저음역과 고음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격렬하고 음울한 단조는 어둠이 짙게 내린 파리 거리를 비장미로 물들였다. 독일 작곡가와 헝가리 작곡가의 차이일까? 두 곡은 첼로라는 악기로 내는 소리가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 주었다.
'레오 까락스' 감독의 음악 취향은 영화 <홀리 모터스>에서도 드러난다. 감독의 페르소나인 '드리 라방'이 또다시 주연을 맡은 이 영화에서는 첼로 대신 반도네온이 등장한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음악 덕분에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다.
주인공 알렉스는 거리에서 ‘불 쇼’를 하면서 살아가는 노숙자다. 하루 일이 끝나면 보수 공사 중인 퐁네프 다리로 돌아와 지친 몸과 마음을 쉰다. 밤에는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는 이마를 아스팔트에 문질러 피가 나도, 배를 유리로 그어도,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진 채 지나가던 차에 발이 치여도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고통에 무감각 해지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삶의 이력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어느 날 자신의 쉼터에서 자고 있는 미셀이라는 낯선 여자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사랑했던 첫사랑 연인이 떠나간 충격과 화가에게는 치명적인 시력상실로 인한 고통 속에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서로의 상처를 알아본 것일까? 둘은 가까워지고 사랑에 빠진다.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하는 불꽃놀이가 화려하게 펼쳐진 퐁네프 다리 위에서 격정적으로 춤을 추는 장면은 잊지 못할 명장면이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 이 흐르고 왈츠곡에 맞춰 둘은 미친 듯이 춤을 춘다. 남녀가 격식에 맞춰 추는 우아한 춤이 아니다. 몸 가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열정적으로, 때로 섬뜩한 광기마저 뿜어내며 음악에 몸을 맡긴 채 무아지경에 빠져 춤을 춘다.
카메라는 다리 위에서 펼쳐지는 두 사람의 몸짓을 멀리서 천천히 따라간다. 음악은 점점 절정으로 치닫고 둘의 춤사위도 더욱 격렬해진다. 마침내 불꽃이 사그라들 듯 한바탕 춤도 끝이 났다.
알렉스와 미셀은 함께 술을 마시고 고양이 소리같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퐁네프 다리 바닥에서 서로를 안고 뒹군다. 비록 남들 눈에는 한없이 초라해 보이지만 더럽고 누추한 퐁네프 다리가 이들에게는 더없이 편안한 자유의 보금자리였다. 하지만 자지러질 듯한 웃음소리는 무척이나 슬프게 들렸고 둘의 사랑은 절망적이어서 더 애절했다. 이 날 미셀은 평소 지니고 다니던 권총을 알렉스에게 주며 총을 강에 던져 버리라고 한다. 상상 속에서 첫사랑 줄리앙을 죽였던 미셀이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순간이다. 미셀이 잠든 사이 알렉스는 쪽지를 써서 그녀 옆에 두고 간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일 아침 ‘하늘이 맑다.’고 말해 줘. 그게 만일 나라면 나는 ‘구름이 검다.’라고 대답할 거야. 그러면 서로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거야.”
잠에서 깬 미셀이 쪽지를 읽은 후 “하늘이 맑다”라고 말하고, 알렉스는 “구름이 검다”라고 답한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로맨틱한 장면이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미셀을 애타게 찾는 가족들이 지하철 역에 그녀를 찾는 포스터를 붙이고 눈을 고칠 수 있는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되었음을 방송을 통해 알린다. 미셀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운 알렉스는 지하철 역에 걸린 미셀의 사진을 불태우고 포스터를 싣고 가던 트럭을 불태운다. 이 과정에서 알렉스의 실수로 트럭 기사가 불에 타서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미셀을 지키기 위한 알렉스의 처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방송을 통해 가족들이 자신을 찾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시력을 찾을 수 있는 새로운 치료법이 발견되었음 듣게 된 미셀은
“알렉스. 널 진심으로 사랑한 적은 없어. 날 잊어줘.”라는 쪽지와 함께 다리를 떠난다.
수면제에 취한 무거운 몸을 끌며 미셀의 부재를 확인한 알렉스는 다시 홀로 남겨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버리는 방법을 알지 못했던 알렉스는 보관하고 있던 미셀의 권총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쏜다. 손가락이 날아가 버리듯이 고통스러운 사랑의 기억도 날아가기를 바랐던 것일까? 알렉스의 고통이 전해져 가슴이 시렸다.
미셀은 알렉스와 자신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직감하고 잔인한 말을 남긴 채 떠났다. 사랑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떠나버린 연인을 잊는다는 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임을 알았기에 잔인한 말로 자신을 잊기를 미셀은 바랐을 것이다. 미셀은 알렉스의 전부였고 세계 그 자체였다. 세계가 파괴된 알렉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자신을 학대했다.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의 사랑은 이토록 절박하고 처절했다.
이후 방화범으로 체포된 알렉스는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을 하게 되고 시력을 회복한 미셀이 알렉스를 찾아온다. 알렉스가 출감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둘은 다리 위에서 재회한다. 둘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미셀은 시간이 지나자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하며 일어선다. 영화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진 않지만 자신을 치료해 준 의사와 관련이 있어 보이는 장면을 통해 미셀에게는 이미 가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집에 가겠다는 미셀을 끌어안고 센 강으로 떨어진 알렉스는 모래 운반선에 의해 구조된다. 물에 흠뻑 젖은 뒤 다시 예전의 자유로운 미셀로 돌아온 그녀는 알렉스와 함께 ‘끝까지’ 가는 배에 오른다.
이들이 탄 배의 이름은 ‘아틀란티스’ 즉 잃어버린 대륙이다. 언뜻 해피 엔딩으로 보이는 결말은 잃어버린 대륙으로 간다는 점에서 둘의 사랑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절망의 끝에서 부여잡은 사랑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인 존재로 각인되었고 온전히 사랑에 몸을 던질 수 있었다. 비록 예정된 운명이 비극일지라도 전 존재를 걸고 한 사랑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빛이다.
‘하늘이 맑다’라고 말하면 ‘구름은 검다’라고 답할 수 있는 아름다운 연인이 내게도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