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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Feb 26. 2018

우리 개는 안 물어요

- 공감이 부재한 사회 -


한 두 마리씩 반려견을 키우는 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우리 아파트도 예외는 아니다.

며칠 전 아파트 앞 현관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덩치가 산만한 개가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목줄도 풀린 상태라 두려운 마음에 너무 놀라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 반응에 개 주인이 발끈하더니 한 마디 한다.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세요? 우리 개는 안 물어요!”



개를 보고 놀란 상대에 대한 미안함은 찾아볼 수도 없고 자기 개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고 오히려 나를 나무란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기가 막혀 뭐라고 대꾸도 못한 사이, 개 주인은 현관을 빠져나갔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화난 마음을 다스리느라 소중한 하루를 고스란히 날려버렸다.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하느라 아침, 저녁으로 고속도로를 달린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규정 속도를 지키면서 운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따라오던 차가 느닷없이 엄청난 속도로 내 차를 추월해 지나갔다.

거의 부딪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서 순간,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또 어느 날에는 톨게이트에 막 진입하는 중이었는데 옆 차선에서 서너 차선을 한꺼번에 넘어오더니 내 차 앞으로 급하게 끼어들었다. 당황한 나머지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따라오던 뒷 차도 급정거를 했다.

얼마나 화가 나던지 당장 차에서 내리고 싶었지만 운전자는 고개만 까딱한 채 유유히 사라지고 말았다.

사라진 운전자 뒤통수에 대고 혼자 씩씩거리며 험한 소리를 질러봤지만 분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보행자 도로를 걸을 때도 위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어폰을 낀 채 스마트 폰을 하느라 옆 사람을 치고 말없이 사라지는 사람, 인도에서 거침없이 질주하는 오토바이 등 잠시라도 정신을 놓치게 되면 다치기 십상인 위태로운 상황이 펼쳐진다.









공공장소도 예외는 아니다. 영화 관람을 마친 뒤 많은 사람들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

사람이 많아서 자칫 잘못하면 한 번에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는 상황이다.

불안한 마음에 너도 나도 한 발짝씩 다가서는 모습이 아직 도착도 안 한 엘리베이터에 당장이라도 뛰어들 기세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하자마자 몇 명이 우르르 안으로 뛰어들고 덩달아 불안해진 나머지 사람들도 급하게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려든다.

들어가려는 사람과 나오려는 사람이 뒤엉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안의 사람이 먼저 내려야 밖의 사람이 쉽고 편안하게 탈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사람들은 모르는 것일까.    




점점 공감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내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거나 피해 입을 상황이 생기면

무척 예민하게 굴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에는 둔감하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럽지만 남에게는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며 손익을 따진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사는 삶이니 뭐가 문제냐고 하면 그만일까?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따라서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은 사회의 유지와 존속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내 욕망만 채우는데 급급하다 보면 타인에 대한 배려는 설 자리는 없어진다.

배려가 사라진 사회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과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다른 말로 공감이라고 한다.

공감(共感)은 함께 공(共), 느낄 감(感)이라는 한자어를 쓴다.

타인이 느끼는 감정을 그 사람처럼 느끼는 것이 바로 공감이다.

그래서 공감은 어렵다.     




공감과 비슷한 말로 동감이 있다.

애덤 스미스는 동감을 ”함께 하는 기분을 경험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의 강력한 감정 상태를 보는 것이라 정의했다.

누가 고통받고 있는 것을 볼 때, 그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은 욕구를 느낄 때 우리는 동감을 경험한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 바로 옆에는 고물상이 있다.
아침마다 폐지가 가득 실린 무거운 수레를 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삼삼오오 모여드는 곳이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갑자기 소나기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양동이로 누가 물을 퍼붓는 것처럼 억수 같은 비가 내렸다.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여도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간신히 학교 앞 고물상에 다다를 때 즈음 폐지를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다. 할머니의 옷과 머리는 순식간에 비에 젖었고
수레에 실린 폐지도 물에 완전히 젖어 버렸다.
무거워진 수레를 감당하기 힘겨워진 할머니의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출근하던 길이라 그분의 모습을 뒤로하고 학교로 들어섰지만 할머니의 모습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내가 할머니를 보고 불쌍하다고 여기고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동감이다.

그런데 갑자기 쏟아진 폭우 속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할머니가 느끼는 무력감과 절망감, 늙은 몸으로 폐지수집에 의지해 생계를 꾸려야 하는 절망감까지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공감이다.

물론 할머니의 실제 사정은 알 수 없는 일이므로 짐작일 뿐이지만 그 날 내가 느낀 감정은

엄밀한 의미에서 공감이 아니라 동감이었다.     





동감은 공감과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다. 동감은 내 방식대로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상대가 아니라 나한테 중심이 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내가 타인의 마음으로 건너가서 그 사람의 처지가 되어보는 것이 아니고

내 관점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그의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이 정도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지만 공감에 비하면 진정한 감정의 나눔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동감은 거리를 두고 하는 짐작이지만 공감은 그 사람에게 한발 짝 더 다가서는 일이다.

그래서 공감이 한 수 위이고 더 깊은 감정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에게 영어를 들려주고 아이 방을 한글과 숫자로 도배를 한다.

남보다 조금 더 일찍 학습을 시켜서 똑똑한 아이로 키우고 싶은 부모 마음이다.  

우리는 이렇게 아이의 인지 발달을 위해 무진 애를 쓴다. 그런데 정작 마음의 발달은 소홀히 한다.

마치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발달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착각한다.


하지만 학습을 통해 인지 능력이 키워지듯 감정도 마찬가지다.

교육과 훈련의 결과물이다.

평소 가정에서 부모가 아이의 감정을 잘 읽어주고 부모도 자신의 감정을 잘 인식하고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가 아이 마음을 읽어주면 아이는 자기감정을 잘 알게 되어서 타인의 감정도 민감하게 느끼고 반응할 줄 알게 된다.


군대 내 폭력이나 교실에서의 왕따는 남의 아픔이나 처지에 대해 입장 바꿔 생각할 줄 아는 공감능력의 부재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아이는 친구와 동료를 따돌리지 않는다.    



공감 능력은 대인관계에서 매우 중요하다.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다면 원만한 대인관계는 힘들어지고 사회적 관계에서 점점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점점 공감 능력을 상실해가는 걸까?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입시위주의 교육, 가족끼리 얼굴을 맞대고 앉아도 곧바로

스마트폰으로 관심이 이동하고 각자의 SNS에 매몰되는 현상, 가족의 해체와 1인 가족의 일반화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있을 것이다.


옆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각박한 현실과 독거노인이 굶어 죽어가도 모르는 무관심 속에

나만 잘 살만 된다는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거울인 ‘공감’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려면 평소에 잘 닦아서
깨끗한 해상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타인의 아픔을 민감하게 비춰주는 거울의 소임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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