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호위> 조해진
태영 음반사’ 사장의 딸이었던 고모는 음반사의 단골손님이자 짝사랑하고 있었던 서 군이 건넨 원고 뭉치를 맡게 된다. 다시 찾으러 오겠다는 서 군은 연락이 끊어지고 고모는 전전긍긍하다가 그의 학교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기관원을 조교로 오인한 고모는 원고를 건네주며 서 군에게 전달해 줄 것을 당부한다. 이후 일본 유학생 간첩 사건이 발생하고 서 군은 조직원으로 체포된다. 두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는 명확하지 않지만 자신의 실수로 서 군에게 씻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고모는 평생을 죄책감의 수렁에서 빠지 나오지 못한다. 인생의 판검사를 자처하며 자신의 삶을 엄격하게 재단한다. 역사의 형벌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동안 고모의 기억은 고장 난 형광등처럼 위태롭게 깜박이게 되고 인생의 말미에서 조카에게 조난신호를 보낸다.
조카에게 의지해 인생의 마지막 과제를 수행하려 할 때, 병원 로비에서 마주한 서 군은 휠체어에 의지해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끈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맞이한 해후는 어떤 극적인 서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 군과 고모는 나란히 앉아 물끄러미 텔레비전만 올려다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차에서 우연히 동석하게 된, 그래서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고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볼 까닭도 없는 한시적인 동승자들처럼 보였다”(p. 153)
고모와 서 군의 기이한 재회 장면을 목격한 나는 유실물 센터를 떠올린다. 삶의 궤도에서 이탈한 이들은 기억을 잃고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잃었다. 역사의 폭력, 운명이 저지르는 폭압의 희생양이 되어 함부로 내동댕이쳐졌다. 주인을 잃고 버려진 유실물 센터의 유실물과 다름없었다. 버려진 채 아무도 찾지 않는, 더 이상 필요치 않는,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이 세계의 무용한 조각들. 세계로부터 분실된 존재가 또 하나의 존재에게 마지막 말을 건넨다. ‘미안합니다’ … 하지만 그 말은 서 군에게 닿지 못한 채 낯선 이에게로 향했다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고모의 삶이 압축된, 고모의 삶을 짓눌렀던 쇼핑백은 41327이라는 일련번호가 매겨져 유실물 센터의 선반 위에 놓였다. 주인을 잃은 쇼핑백은 시간이 지나면 선반 위에서 치워질 것이고 이 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삶이란 결국 이런 것인가, 개인의 생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도도하게 흘러가는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인가.
역사가 휘두른 폭력이 개인의 삶을 황폐화시키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 소설은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서 군이 아닌 서 군과 잠깐의 인연을 맺은 고모의 삶을 통해 펼쳐진다. 인간의 삶은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관계망 속에서 이루어진다. 한 사람에게 일어난 사건은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 사람을 중심으로 방사선처럼 퍼져있는 많은 인연과도 고통의 지분을 공평하게 나누어 가진다. 사건 당사자와 연결된 모든 사람들의 삶을 좀먹는다. 서 군이 당한 일로 고모는 평생을 속죄의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고 고모의 삶을 지켜본 화자의 삶 역시 지금과는 달라질 것이다. 거센 역사의 물결 속에서 한낱 인간은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다. 작은 물줄기 하나 바꿀 힘이 없기에 속수무책 당하고 고통받다가 거대한 물살에 휩쓸려 사라진다.
조해진 작가는 탈북자, 고아, 입양인과 같은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약자들을 소설 속에 담아왔다. <사물과의 작별> 은 재일동포 유학생의 삶을 들여다본다. 당시 재일 한국인은 한국과 일본 양쪽 모두에게서 국민으로 대우받지 못했기에 쉽게 간첩으로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기에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었던 사람들, 빛바랜 흑백 신문 기사 속 개인의 삶을 아프게 그려낸 작가가 있었기에 건조한 문장에 가려져 있던 개인의 실존 한 조각이 희미하게 빛날 수 있었다.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타인을 더 들여다 보고 인간적인 것들에 대해서 더 고민하게 되었다고 했다.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타인의 고통을 깊이 알려고 하거나 타인이 느끼는 고통의 실체에 대해 고민하거나 그 고통이 나에게 전가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고도 했다. 어쩌면 소설가는 편하게 살기를 포기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순간 외면할 수 없게 되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삶 속으로 발을 들여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발걸음은 무겁고 느리고 때로 고통스럽지만 작가의 외로운 사투 덕분에 독자들은 타인에게도 남모를 사연이 있고 각자만의 무너진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글을 쓰는 일은 외로운 촛불 하나를 들고 힘겹게 걸어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노심초사하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스럽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시간이 지나면 작은 촛불 주변으로 하나 둘 또 다른 촛불이 모여든다. 조심스럽게 부여잡은 손과 천천히 내딛는 발걸음이 거대한 촛불의 행진을 이어가고 마침내 세상은 조금 환해진다. 작은 촛불 하나가 한 사람의 생애를 온전히 비출 수는 없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상상과 감정의 파도가 물결치는 동안 마침내 한 사람의 존재가 희미하게 드러난다.
평론가 신형철은 ‘세계의 완강한 질서에 도전했다가 무참히 패배하는 개인,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포기하지 않아서 비타협의 결과로 패배하고 만다. 하지만 그 순도 높은 패배가 주인공의 궁극적인 승리가 되는 아이러니의 기록이 소설’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소설은 패배의 기록인 셈이다. <사물과의 작별>에서 주인공이 포기하지 못한 가치는 무엇일까?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는 궁극적인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을까? 고모가 끝까지 놓지 못했던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였을 것이다. 덕분에 그녀는 세게의 유실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평생을 가슴속에 품고 있던 ‘미안합니다’라는 한 마디를 전하는 순간 그녀의 삶은 구원받았다. 짧은 만남 속에서 반짝이는 빛의 호위가 무의미의 세계에서 의미의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를 놓아주었기에.
숫자 속에 묻힌 개인, 거대 담론의 역사 속에서 드러나지 않은 보잘것없는 개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내상을 살피고 주변인의 삶과 상처까지 보듬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소설가의 일이라면 독자의 일은 그저 열심히 읽고 또 읽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