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인 마음여행자 Mar 27. 2023

서촌 2박 3일

-서촌을 걷다-

코로나 19가 초래한 것 중에 여행을 금지하게 만든 죄는 가볍다 할 수 없다. 특히 나 같은 여행 마니아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다. 방구석에서 지난 사진첩을 꺼내 보면서 아쉬움을 달래거나 여행 유튜버들의 과거 영상을 돌려 보고 마음을 달래며 지난 2년을 보냈다. 긴 시간의 터널을 이제 조금씩 빠져나오고 있다. 낯선 장소, 낯선 상황에의 에피소드는 좋은 일은 더욱 미화되고 나쁜 일도 각색되기 마련이다. 마음이 우울하거나, 여행이 고파질 때면 기억의 저장고에서 하나씩 꺼내서 음미한다. 상상이 더해진 추억은 진한 그리움을 자아내고 떠날 수 없는 현실이 더욱 원망스러워진다. 


다시 떠나고 싶었다. 거기가 어디든… 마음을 먹고 정보를 검색했지만 오랫동안 시간을 들인 결과는 ‘가고 싶은 곳이 딱히 없다’는 다소 허무한 결론이었다.  전국의 이름난 관광지. 아름다운 뷰, 환상적인 숙소 등은 더 이상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미 가 본 곳은 식상했고 안 가본 곳도 거기서 거기일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떠나고 싶지만 가고 싶은 곳이 없는 아이러니라니… 당황스러웠다.


여행에 대한 신선한 기대나 갈망 대신 매너리즘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언젠가 책에서 봤던 ‘여행이 지겨워지는 날이 온다’고 했던 문장이 기억났다. 그때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세상 모든 게 다 지겨워지도 여행은 예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행이 지겨워진다고? 말도 안 돼.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곳을 동경하고 금방 싫증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했던 사람과도 한 순간에 돌아서서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인간이니까. 덜컥 겁이 났다. 여행마저 지겨워지면 이제 무슨 낙으로 산단 말인가? 


고민 끝에 관광보다는 ‘쉼’에 포커스를 두기로 했다. 개학 전에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혼자만의 2박 3일을 보내기로 마음을 정했다. 서촌이 여행지로 낙점되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고 몇 번 가 보긴 했지만 대부분 스쳐 지나가는 정도여서 자세히 보지 않았다는 점, 재래시장인 통인시장이 있다는 것도 후보지로서 후한 점수를 받았다. 재래시장이 없는 동네에 살다 보니 시장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게 있다. 관광지에 가면 루틴처럼 재래시장을 찾는 건 그래서다. 통인시장 근처 에어비앤비는 고즈넉한 주택가에 자리 잡은 빌라 2층이었다. 골목 깊숙이 위치한 집이었지만 스마트한 앱 덕분에 스마트하지 못한 나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야 보이는 현관 입구에서 주변을 잠시 둘러보았다. 작고 귀여운 옹기 안에 오종종한 꽃들이 고개를 뾰족 내밀고 있는 작은 화단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래된 빌라의 계단은 미지의 세계, 낯 선 장소로 이어지는 마법의 통로인양 가슴이 설렜다. 러브하우스의 주인공처럼 잠시 문 앞에서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따라라라~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햇빛이 잘 드는 거실이었다. 가로가 긴 구조의 거실에는 나무로 만든 식탁 겸 책상이 동선을 따라 가로 놓여 있었다. 투명한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노란 줄무늬 띠를 그려놓 은 거실은 편안하고 아늑했다. 거실 한편에 있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하니 좋은 음질의 곡이 흘러나왔다. 거실 옆 쪽으로 주방이 자리하고 있었다. 식기와 주방용품들이 잘 갖춰진 주방은 여행자들이 따뜻한 한 끼를 해결하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침실은 따로 있었다. 정갈한 침구와 오래된 책상, 옷걸이가 있는 방은 아늑하고 따뜻해서 누우면 금방이라도 잠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호텔과 달리 에어비앤비에서는 호스트를 느낄 수 있다.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는 곳의 숙소라면 영화를 좋아하는 호스트일 것이다. 컵라면이나 간단한 스낵을 갖춰놓은 곳의 호스트는 작은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일지 모른다. 먼지 한 톨 없는 실내와 깨끗이 세탁한 이불에서 기분 좋은 바스락 거림이 느껴진다면 그곳의 주인은 단정하고 청결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고치 속의 실처럼 밑도 끝도 없는 상상력이 풀려 나온다. 호텔은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불편함이 없고 인테리어가 세련됐다. 하지만 거푸집에서 찍어낸 것처럼 구조나 생김새가 죄다 비슷해서 취향이 드러나는 애어비엔비와는 많이 다르다. 편하지만 재미가 없다. 결국 잠만 자고 나왔다는 생각에 본전 생각이 날 때가 많다. 


짐을 대충 정리한 뒤 동네 산책에 나섰다. 계단을 막 내려오는데 할머니 한 분이 인사를 건넸다. ‘어디 가시나 봐요?’ ‘네? 아 네…’ 아파트 생활자는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면 일단 경계부터 한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나?’ 하는 생각에 표정관리가 잘 되지 않는다. 얼떨결에 모호한 대답을 하고 갈길을 재촉했다. 잠시 후 여기가 오래된 주택가다 보니 동네 사람들끼리 이미 잘 아는 사이일 테고 오가면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살 거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나에게 특별히 할 말이 있거나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늘 하던 행동이 몸에 배어 있어서 이방인에게도 반갑게 인사를 건넨 것이라도 것도…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습성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게 말을 걸어오는 곳. 사람냄새 물씬 나는 서촌에서의 작은 여행의 시작이었다. 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속도를 한 템포 늦추고 천천히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서촌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백성들은 각 부에 속하는 마을을 ‘○촌’이라는 식으로 편하게 불렀는데, 서촌은 경복궁의 서쪽마을이란 의미에서 서촌으로 불렸다고 한다. 북촌이 사대부 집권 세력의 거주지였다면 서촌은 역관이나 의관 등 전문직 중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옛 모습을 간직한 한옥 800여 채가 남아 있는 곳은 북촌이고 낡은 빌라와 한옥이 공존하는 곳은 서촌이다. 시인 윤동주, 화가 이중섭, 이상과 같은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 서촌주민이었다고 한다. 


서울을 찾는 사람들의 필수 관광 코스가 된 북촌과 달리 서촌은 조용한 편이다.  프랜차이즈가 눈에 띄고 관광지 느낌이 물씬 나는 곳이 북촌이라면 저마다의 감성을 간직한 동네가게들이 오랜 세월 영업을 이어가고 있는 곳은 서촌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인 대오서점과 지역 토박이들이 운영하는 부동산, 단팥빵이나 소보로 등 옛날 감성 물씬 풍기는 동네 빵집 등 오랜 시간 서촌과 함께 한 이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찬찬히 살펴보니 꽤 많은 가게가 있었다. 편집샵, 가죽공예점, 옷 가게, 액세서리점들이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었다. 저마다의 독특한 개성으로, 특이한 컨셉을 내세워 행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나 큰 간판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가게는 거의 없었다. 자칫 그냥 지나칠 법한 곳에 자리하고 있거나 간판이 눈에 띄지 않아 가게인 줄 모르고 지나간 곳도 있었다. 천박한 관심을 갈구하지 않는 초연함에서 기품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가게 안을 들여다보면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며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이 창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고 가게 주인의 감성을 담은 상품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동네를 돌아보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는 동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파스타 집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은 뒤 침대에서 꿀잠을 자고 나니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여행지에서의 새벽 산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루틴 중 하나다. 서둘러 옷을 입고 다시 산책길에 나섰다. 신선한 공기와 출근을 서두르는 직장인들의 바쁜 걸음, 새벽을 여는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아 부지런을 떨었다. 주택가를 벗어나니 마을버스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출근을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을 뒤로하고 통인시장으로 들어섰다. 이른 아침이라 문을 연 가게는 별로 없었지만 장사준비로 분주한 상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국밥 집은 이미 장사를 시작한 듯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겨운 시장을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서니 어디선가 커피 냄새가 흘러나왔다. 이른 시간에 문을 연 골목 카페는 이미 만원이었다. 차가운 아침 공기를 맞으며 걸었더니 따뜻한 커피 생각이 간절해서 라테를 주문했다. 손님들은 서로 아는 사이인 듯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커피 향에 묻어 카페 안은 한결 향기로웠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따뜻한 라테를 조심스럽게 두 손에 받쳐 들고 천천히 걸어 다시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산책만 했을 뿐인데도 기분이 좋았다. 유명 관광지에서 볼거리를 찾아 바쁘게 움직일 때는 몸과 마음이 모두 피곤했다. 가성비, 효율을 따지며 계산기를 두드리느라 평소보다 더 바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동네 빵집에서 사 온 갓 구운 마늘 바케트와 커피로 아침을 먹는 동안 블루투스 스피커에서는 차분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행복은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동네 탐방에 나섰다. 전날 밤에 점찍어 둔 카페에 가 보기로 했다. ‘알베르게’란 이름의 카페였다. ‘알베르게’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선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의미한다. 스페인 컨셉을 정면으로 내세운 카페였다. 오래된 건물을 사용하고 있어 인테리어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서니 클래식한 분위기와 스페인과 관련 오브제로 가득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카페 콘 레체’를 주문했다. 그런데 라테 아트가 좀 특별했다. 자주 보던 꽃이나 하트 대신 순례자를 상징하고 긴 순례길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가리비가 부드러운 거품 위에 앉아 있었다. 벽난로가 있는 개인실에는 스페인의 대표 작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산초의 오브제가 있었고 투우를 상징하는 무섭게 생긴 검은 소의 조각상도 있었다. 이 외에도 순례길 사진, 스페인 맥주 Estrella 등을 보고 있으니 마치 스페인의 가정집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리비가 사라지는 게 아쉬웠지만 따뜻한 커피가 부드럽게 목구멍을 통과해 내려가는 동안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다녀왔던 스페인 여행이 떠올랐다. 그때 그 맛을 기억하며 맛있게 한 잔을 비웠다. 


그동안의 여행이 볼거리를 찾아 떠난 여행이었다면 이번 여행은 오로지 쉬면서 혼자만의 시간 속으로 떠난 여정이었다. 관광객 마인드로 방문했던 기존의 서촌과 동네 주민들 속에서 섞여 보낸 이틀은 완전히 달랐다. 틈 날 때마다 산책하고 작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책을 읽으면서 보낸 시간이었다. 동네를 오가는 정겨운 마을버스를 바라보며 이곳에 다시 올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거기가 어디든 언제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어 좋다. 그리고 다행이다. 여행이 지겨워진 게 아니라서… 

작가의 이전글 영화 [69세] 노인은 여자가 아닐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