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망했어’라는 말이 유행처럼 돌아다닌다. 살기 힘들고 뜻대로 안 되는 인생에 대한 자조적인 유머일 것이다. 이번 생에 포기한 것들이 나에게도 꽤 있다. 그렇다고 다음 생에 반드시 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가끔 꿈을 꾼다. 꿈에서 나는 은행 직원이다. 가슴에는 내 이름 석자가 새겨진 이름표가 달려있고 감색 유니폼은 깨끗하고 단정하다. 고객이 맡긴 돈을 꼼꼼히 체크하고 관리하느라 바쁜 어느 날 기어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장부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성난 고객이 내 멱살을 잡고 사장의 불호령에 이어 회사에서 잘리는 일이 꿈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신용범죄자로 몰려 수갑을 차고 끌려가는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은 모습을 또 다른 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바라보고 있다. 꿈에서 깨고 난 후에도 쉽게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멍한 상태가 지속된다. 한참 만에야 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숫자와 디테일에 약한 내가 은행직원이 되었다면 그 은행은 신용에 금이 가서 뱅크런 사태를 초래했을지도 모른다.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릴 때가 정말로 있다. 이번생에서 제일 먼저 포기한 건 은행직원이다. 다음 생에도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혹시라도 타고난 성향이 완전히 바뀌어서 현실적이고 세밀함을 갖춘 캐릭터로 거듭난다면 모를까.
디테일을 담당하는 뇌 영역이 남들보다 약한 관계로. 실생활에서 손해를 본 경험이 무수히 많다. 열차 시간을 착각해서 기차를 놓치기도 하고, 택배를 다른 집으로 보내기도 한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그때뿐, 또다시 부모님 집이나 동생 집으로 택배가 배달되는 일이 생긴다. 설상가상으로 택배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해서 애꿎은 직원에게 항의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그동안 갖다 버린 우산이 부지기수라서 모아서 장사를 해도 될 정도다. 초등학교 때는 가방을 두고 신주머니만 덜렁거리며 등교한 때도 있었고 엄마가 새벽에 일어나 정성스레 싸 주신 담임 선생님의 도시락(옛날에는 엄마들이 담임교사의 도시락을 싸 던 때가 있었다)을 택시 안에 두고 내리는 바람에 우리 담임 선생님은 옆 반 선생님의 도시락을 구걸해야 했던 슬픈 전설도 전해 내려온다. 애초에 싹수가 보였다고나 할까.
천성적으로 메여 있는 삶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이러니하게도 조직, 그중에서도 가장 경직된 조직 중 하나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 곳에서 근무하고 있다. 나와 맞지 않다는 걸 깨달았지만 때려치우고 프리랜서의 삶을 선언하기엔 경력도, 배짱도 없었다. 소심하게 혼자서 딴짓(글쓰기)을 하면서 직장생활의 피로감을 간신히 버텼다.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지면 직장의 노예에서 해방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파이어족에 도전했다. 하지만 파이어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꾸준한 현금흐름이 있어야 직장도 그만두고 노후 생활도 보장받을 수 있지만 현실은 파이어는커녕 월급과 동시에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는 잔고로 인해 월급날이 되면 심한 허탈감에 빠진다. 결국 이번 생은 직장에서 버티기로 굳게 다짐했다. 프리랜서는 다음 생에서 꼭, 기필코…
요즘 유행하는 MBTI 유형 중의 하나인 ESTJ의 삶 또한 현생에서 깨끗하게 포기했다. 나와는 모든 면에서 반대의 유형이라 아무리 노력해도 이 생에서는 구현하기 어려운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알려진 바로는 ESTJ는 ‘프로 일잘러’에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상대방을 설득해서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능력 또한 탁월하다고 한다. 현실적이어서 재테크도 잘할 것 같고 책상 위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을 것만 같다. 삶 자체가 계획과 정돈을 동력으로 힘차게 굴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어떨까? 운전대만 잡으면 순식간에 멍 때리기(N) 모드로 들어간다. 인천공항에 전혀 볼일이 전혀 없음에도 딴생각을 하느라 이정표를 놓치는 바람에 속수무책 인천대교로 진입했던 날 진심으로 내가 미웠다.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서 유일한 해결책은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 나오는 것뿐이었고 거금의 통행료를 물고 왕복 40Km어치의 기름을 길바닥에 쏟아부은 뒤에야 가던 길을 갈 수 있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 있으면 정신이 혼미해져서(I) 집 생각이 간절해지고, 책상 위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어차피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다는다(P)’ 는 철학을 탑재한 터라 큰 스트레스 없이 뭐든 닥치는 대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무능한 상사보다 성격이상한 상사와 일하는 걸 더 힘들어 (F)하는 성향을 가졌다. 갖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는 게 사람인지라 ESTJ처럼 확실하고 명확하고 사사로운 정에 연연하지 않는 합리적인 사람으로 한 번 살아보고 싶다. 타고난 성격으로 인해 이번 생에서는 깨끗이 포기할 수밖에 없지만…
여행작가를 꿈꾸던 때가 있었다. 여행과 글쓰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일인 데다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노마드 족이 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환상적인 직업은 없었다. 스릴과 어드벤처로 가득한 오지 여행이 끝나면 발리의 멋진 휴양림을 배경으로 노트북을 두드리는 내 모습은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하지만 현실은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의 똘망똘망한 눈망울과 갚아야 할 대출금, 눈뜨면 출근해야 할 직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의 눈빛을 외면하고 배낭 하나 메고 훌쩍 떠날 만큼 간뎅이가 크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맞벌이를 하다 보니 커질 대로 커진 씀씀이를 감당해야 했기에 사표는 언감생심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실은 마음만 먹으면 A4지 몇십 장을 순식간에 써 내려가는 필력이 내게 없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작가는 역시 꿈의 직업임이 틀림없다. 꿈은 꿈으로 남아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는 횡설수설로 다음 생을 기약해 본다.
그때 그랬더라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면…이라는 말속에는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담겨있다. 인생은 곧잘 여행에 비유되고 우리는 인생이라는 여행길에 오른 여행자이기에 어느 길을 택하더라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남게 마련이다.
가지 않은 길이 아름다운 건 가지 않아서는 아닐까. 내가 밟지 않은 낙엽이 고스란히 쌓인 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한 켠을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겨두고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나는 윤동주 시 속의 화자처럼 가만히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