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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Apr 07. 2023

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 서부전선 이상없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

기억은 묘하다. 기억하려고 애를 써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가 하면 생각조차 안 하고 있던 일이 의식의 수면 위로 불쑥 떠오르기도 하니 말이다. 사춘기 시절 읽었던 레마르크의 <개선문>은 후자의 경우다. 제목에 이끌려 문고판으로 나온 <개선문>을 오래전에 읽었다. 고전 한 두 권은 읽어줘야 한다는 사춘기 소녀다운 치기와 낭만적인 제목에 이끌려 집어 든 책이었다.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당시만 해도 개선문이 있는 파리는 영화나 사진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낭만의 도시였다. 화려한 에펠탑과 개선문은 아름다운 파리에 환상 한 스푼을 더했다. 제목에 혹해서 읽기 시작했지만 낭만적인 소설과는 거리가 멀었다. 건조한 문체는 지루했고 분위기는 음울했다. 내용은 물론 다 잊어버렸지만 희미하게 남은 기억의 사금파리를 모아 보니 전쟁을 피해 망명한 외과의사 라비크와 조앙이라는 여자의 사랑이야기였다. 주인공 라비크는 파리의 바에서 늘 같은 술을 마셨는데 ‘칼바도스’란 이국적인 이름의 술이었다. 와인도 아니고 위스키도, 럼주도 아닌 칼바도스라니.  책을 읽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도 ‘칼바도스’라는 네 음절이 입 속에서 맴돌았다. 언젠가 어른이 되어 파리에 갈 기회가 생기면 이 술을 꼭 먹어보리라는 다짐을 그때 했다. 하지만 파리는 다녀왔는데 칼바도스는 먹어보지 못했다. 레마르크를 떠올리면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난다.


무의식 속의 자아가 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선택하게끔 이끌었는지 모를 일이다. 전쟁영화, 그것도 1차 대전이 배경인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영화의 원작이 레마르크의 동명의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1930년과 1979년에 이어 2022년에 세 번째로 영화화되었다. 17세의 파울은 입대를 부추기는 교사의 연설을 듣고 조국 독일의 명예를 더 높이겠다는 영웅심리에 도취되어 친구들과 함께 입대를 결심한다. 마치 운동경기에 참가하는 듯한 흥분과 들뜬 마음을 간직한 채. 하지만 비 오듯 쏟아지는 포탄을 뚫고 돌격하면서 마주한  진실은 자신들의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고 기성세대의 가르침이 거짓과 위선이었다는 것이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인간성이 거세된 채 전쟁의 부품으로 전락한 병사들은 살기 위해 누군가의 아들과 아버지를 무참히 난도질해야 했다. 우연히 비껴간 죽음 후에 찾아온 잠깐의 평화 속에서 하루치의 생명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파울은 자신을 떠받치고 있던 확고한 세계관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소년은 과거를 떠나보내고 미래의 희망을 포기한 무력한 노인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전차와 화염방사기가 처음 등장한 전쟁이 1차 대전이었다고 한다. 생전 처음 보는 신무기 앞에서 어찌할 바 몰라 공포에 질린 어린 군인들의 모습, 이들을 극한의 상황으로 내 몬 장본인은 기성세대였다. 권력층의 이해관계와 탐욕을 위해 총알받이가 된 소년들은 전장의 불구덩이 속에서 엄마를 부르며 죽어갔다. 하지만 ‘애국’과 ‘민족’을 앞세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전장으로 내 몬 교육자나, 권력자들은 티끌 하나 다치지 않았다. 국가는 허상에 불과했고 지도자는 국민을 위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역사는 끝없이 반복된다. 무수한 목숨을 담보로 간신히 얻은 평화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애국’이나 ‘국가’를 앞세워 이념몰이를 하고 전쟁을 부추기는 세력이 존재한다. 정작 그들 자신은 전쟁에서 피 한 방울 흘릴 의사가 없음에도 말이다. 십 대 후반, 이십 대 초반의 병사들은 아직은 엄마의 위로가 필요하고 아버지의 든든한 어깨에 기대야 하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비극적 상황으로 내몰린 이들은 꽃다운 젊음을 채 피우기도 전에 하나 둘 쓰러졌다. 살아 돌아온다 한들 이미 생을 다 살아버린 듯한 황폐한 내면으로 인해  또 다른 지옥 속을 헤매게 될 것이다.


영화는 주로 시각과 청각에 의존하는 예술이다. 하지만 때때로 오감을 총동원하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가 그랬다. 끔찍한 전장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파울의 공포와 좌절, 분노와 슬픔을 함께 느끼는 동안 내 눈에는 어느새 이슬이 맺혔다.


기존의 전쟁영화가 한 사람의 영웅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감동 스토리에 초점을 맞추거나 빛나는 전우애를 내세운 휴먼 드라마로 전쟁의 비극을 은폐시켰다면 이 작품에서는 단 한 명의 영웅도 등장하지 않는다. 죽음을 앞둔 전우의 군화를 탐하는가 하면, 육탄전이 벌어지는 참호 속에서도 눈앞의 음식을 외면하지 못하는 병사,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적을 살해 한 뒤 주머니 속에서 나온 가족사진을 보고 죄책감에 몸부림치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무심하게 보여준다. 죽음은 전쟁의 일부분이고 주인공의 죽음 또한 무수한 다른 병사의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전쟁의 비극과 삶의 아이러니를 극대화시켰다. 이런 모습이 전쟁의 민낯이고 진실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잦은 침수로 위생상태가 엉망인 참호 속에서 하루하루 생과 사의 경계를 오가는 병사들과 대조적으로 지도층은 우아한 식탁에서 고급요리로 식사를 한다. 신선한 빵을 찾고 먹다 남은 음식은 개한테 던져준다. 자신들의 명예와 이해관계를 위해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몬 그들의 일상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푸른빛의 배경은 계절이 겨울인 것과 함께 차가운 전쟁의 이미지를 보여주었고 절제된 음악은 영화의 몰입도를 높였다. 인류는 수많은 전쟁을 겪었지만 또다시 전쟁을 하고 무의미한 살상을 되풀이한다. 국가나 민족을 위해 싸우는 것이 국민의 의무이고 전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외치면서…하지만 정작 전쟁을 부추긴 자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는다.

전쟁은 두려운 것이다. 그리고 두려워해야 마땅하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휴전협정에 사인을 하고 종전까지 30분도 안 남은 상황에서 장군은 출동을 명령한다. 마지막 전과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거부하는 병사는 그 자리에서 총살한다. 원작과는 다르지만 실제 전장에서 분명히 일어난 일이었다. 공식 적인 기록으로 종전 당일 10,944명의 사상자와 2,738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공식 기록상 마지막 사망자는 종전 1분 전 사망한 미군 병사라고 한다. 천만 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1차 대전의 결과는 몇 백 미터의 땅을 차지한 것이 고작이었다.


이제 파울에게 남은 선택지는 부나방처럼 죽음을 향해 뛰어드는 것 외에는 없다. 퀭한 눈, 모든 희망과 의지를 상실한 무표정한 얼굴의 파울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했다. 결국 그는 숨을 거두고 곧바로 교전 중지 명령이 떨어진다.


그리고 ‘서부전선 이상 없음’이라는 보고서가 올라간다. 제목의 의미가 무겁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리뷰를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영화의 여운에서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개별자의 죽음이 지워진 위에 숫자로 표기된 전쟁은 죽음을 통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스탈린의 말로 알려진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는 말은 사실 라마르크가 한 말이다. 이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작가가 몸으로 체험한 문장이다.


파울이 마지막 전선을 향해 뛰어가던 순간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잊혀지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나서 레마르크를 다시 읽어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아, 어머니, 어머니! 전 어머니에겐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왜 저는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울 수 없나요? 왜 저는 늘 씩씩하고 의젓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요? 저도 한 번쯤 울면서 위로를 받고 싶습니다. 저는 아직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요. 장롱에는 아직 내가 어릴 때 입었던 짧은 바지가 걸려 있다. 그때가 마치 어제와 같은데, 왜 그 시절이 이토록 훌쩍 지나가 버렸는가? - <서부전선 이상 없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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