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가 내 생일날, 이태원에 있는 내추럴 와인 전문 레스토랑을 예약했다면서 생일파티를 그곳에서 하자고 제안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땡큐였다. 맛있는 음식과 와인이라니. 환상의 조합이 아닌가. 그런데 내추럴 와인이 뭘까 싶었다. 와인은 어차피 내추럴한 상품이 아니었던가? 포도를 주원료로 발효시킨 것이니 말이다. 궁금증을 장착한 채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다양한 종류의 와인이 빽빽하게 인쇄된 메뉴판이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너무 많으면 오히려 선택장애가 오는 데다 우리는 내추럴 와인 생초짜들이었다. 도통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직원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내추럴 와인이 처음이고 생일파티 중이라 했더니 오렌지 와인을 추천해 주었다. 투명한 오렌지 색이라 붙여진 이름인데 처음 시도하기 괜찮다고 했다.
나는 와인 맛을 잘 모른다. 맥주는 취향이 확실해서 라거보다는 밀맥 위주로 마시고, 하이볼은 베이스 위스키가 뭔지 꼭 물어본 뒤 선토리 위스키가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하지만 와인은 바디감, 탄닌, 당도, 일조량 대신 가격을 보고 고른다. 가볍게 마실 때는 싼 거, 격식이 필요한 자리 나 선물을 할 때는 조금 더 비싼 것 위주로 구매한다. 하지만 나도 미각은 있는지라 레드보다는 화이트 와인이 입에 맞는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청량하고 투명한 느낌이 다소 무겁고 텁텁하게 느껴지는 레드 와인보다 혀 끝에 닿았을 때 부담이 적다고 느껴져서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달달한 포트와인은 입에 잘 맞는다. 단 맛을 좋아하지 않지만 포트 와인은 주정강화 와인이라 높은 도수가 단 맛이 품은 느끼함을 상쇄시켜 주기 때문이다.
잠시 후 한눈에 봐도 화려한 요리와 와인이 차가운 얼음과 함께 나왔다. 맛을 봤더니 괜찮았다. 화이트 와인과 비슷했지만 내 입맛에는 조금 더 잘 맞았다. 내추럴 와인의 독특한 점은 우리나라 막걸리처럼 한 번에 두 가지 맛을 경험할 수 있다는 거였다. 일단 병을 흔들지 말고 맑은 상태로 반 정도 마신다. 깔끔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이제 남은 와인을 병째 흔들면 불투명하고 뽀얀 색으로 바뀐다. 맑은 와인과는 또 다른 색 다른 맛이 난다. 신기했다. 아이들 덕분에 내추럴 와인이라는 신세계에 입성한 그날, 알코올에 대한 취향 하나가 추가되었다.
몇 달이 지난 후 남편이 갈 데가 있다고 하면서 내추럴 와인 시음회 티켓을 내밀었다. 같이 가서 맛도 보고 와인공부도 하자 했다. 내심 고마웠다. 하지만 내게 시음이라 하면 대형 마트가 먼저 떠오른다. 지글지글 불판에서 먹음직스럽게 익고 있는 삼겹살이나 따뜻한 만두, 신상 면 요리를 조그만 종이컵에 담아 주는 장면 말이다. 하지만 남편이 보여준 티켓의 값은 4만 원이었다. 두 사람이니 8만 원을 지불했을 터였다. “무슨 시음회를 8만 원씩이나 주고 가?” 고마운 마음이 아깝다는 마음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가성비 때문이었다.
툴툴거리며 시음장소에 도착했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되는 작은 가게였다. 개발자로 일하다가 와인에 빠져 가게까지 차리게 됐다는 젊은 여사장과 아내의 일을 기꺼이 돕고 있는 남편을 보니 호기심이 일었다.
시음회 참석자는 우리 부부를 포함해서 8명이었다. 처음에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멈칫했다. 대부분의 연령대가 20대 후반, 30 대 초반의 미혼으로 추정되는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세대차가 한참 날 것 같은 나이차에 머쓱한 마음이 들었지만 곧바로 지정된 자리에 가서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간단한 안주와 와인 잔이 세팅되어 있었다. 와인가게 사장님이 와인의 특징이나, 맛, 재배 지역 등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내추럴 와인의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일반 와인은 주조 과정에서 포도 외에 첨가물이 들어가지만 내추럴 와인은 포도 외에는 일절 첨가물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추럴 와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일반와인 보다 가격이 조금 더 비싼 건 그래서였다.
내추럴 와인의 유행은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층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환경에 대해 관심이 많은 젊은 층이 비건식을 하고 유기견을 입양해서 키우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듯했다. 순수한 포도만 사용하는 와인은 환경에 무해할 것이므로 비건식과 마찬가지로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추럴 와인을 마신다고 한다. 이 세계는 잘 모르지만 이왕 마시는 거, 내추럴해서 자연에 도움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8명의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성별만 맞았다면 소개팅이라도 하는 분위기였다.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어색했던 분위기도 잠시 와인 병이 쌓여감에 따라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음의 빗장을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금세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고 취기 덕분인지 말도 술술 잘 나왔다.
짐작대로 그날 모인 사람들은 모두 직장인이었고 게임회사, 마케팅 회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들이었다. 공무원 세계에만 익숙한 나는 이들의 직업세계가 생소했고 그래서 궁금증과 호기심이 일었다.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면서 하는 일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얘기가 오갔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는 직업일지라도 누구나 겪고 있는 직장생활의 애환과 진로에 대한 고민은 세대 불문 마찬가지였다. 오래전에 나도 지나온 길이었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라테는’으로 시작하는 충고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말을 아꼈다. 꼰대 소리를 듣기는 죽기보다 싫어서였다.
사장님이 준비한 와인과 와인과 잘 어울리는 담백한 안주, 몰랐던 내추럴 와인의 세계에 접속하고 보니 4만 원이 결코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가성비 최고였다. 그날 우리는 1인 1병의 와인을 깔끔하게 비웠다. 게다가 젊은 세대와 허심탄회하게 대화까지 나눌 수 있었으니 이만하면 가성비 최고라 할 만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이 탓이었을까? 와인 한 병은 내게 무리였다. 사실 와인은 과일주가 속기 쉽지만 생각보다 도수가 있다. 기분이 점점 좋아지더니 급기야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남편 덕분에 수치스러운 장면이 연출되기 직전, 무사히 와인샵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후의 장면은 상상에 맡기겠다. 아이들 덕분에 내추럴 와인을 알게 되었고 내추럴 와인 덕분에 잠시나마 젊은 세대와 교감할 수 있었다. 날씨가 제법 무더워졌다. 청량감 있는 내추럴 와인 생각이 간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