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돌을 매달은 것처럼 무거웠다. 고령이신 두 분 부모님이 더 이상 생활을 꾸려나가기 힘든 지경에 이르러 내가 살고 있는 곳 근처로 모셔오기로 한 날이기 때문이다. 이삿짐센터에 짐을 맡기고 부모님은 차로 따로 모셔야 해서 친정으로 내려갔다. 봄은 한창이었지만 내 마음은 차디찬 겨울의 한 자락을 지나고 있었다.
이사를 하루 앞둔 집은 부모님의 삶처럼 어수선했고 낡은 짐들이 여기저기 함부로 부려져 있었다. 근육이 모두 빠져나간 다리는 체중을 지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아 한 걸음, 한 걸음이 버거운 아버지는 내 삶의 보호자로 단정하게 자리하시던 예전의 모습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허리 수술 후 더욱 수척해진 어머니는 펠리컨처럼 늘어진 목살로 나를 슬프게 했다. 이제는 내가 늙은 부모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다 보니 새로운 집은 금방 정리 되었고 오자마자 두 분은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자리에 누우셨다. 나머지 짐을 정리한 뒤 반찬 몇 가지로 냉장고를 채웠다. 딸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부모님은 말이 없었다. 허공을 응시하며 무기력하게 의존할 뿐이었다. 그 눈길이 부담스러웠고 부담스러운 마음은 죄책감으로 이어졌다. 거동이 자유롭지 않게 된 이후로 부모님은 자주 ‘미안하다’고 하셨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우리 몸은 어느 순간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어 있다. 자유의지로 가능하지 않은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부모님의 ‘개별적인’ 인 늙음과 고통은 피붙이인 딸조차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누구나 겪는’ ‘늙음’의 단계를 지나고 있다는 일반적인 명제 속에 가두기엔 두 분이 지나온 삶의 스펙트럼은 한없이 넓었다.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은 외롭고 고독하다. 부모님의 고통과 고독의 한 자락도 나눠 가질 수 없는 나는 그 고통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영화 평론가 김혜리의 말대로 ‘정확하고자 하는 노력이 사랑’이라면 부모님의 고독과 슬픔의 정확한 지점에 닿기 위한 노력을 ‘사랑’이라는 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집에 도착한 나는 한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