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군의 오토바이

by minmin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저녁에 시작되던 학원 수업이 낮 시간으로 바뀌었다. 보통 10시쯤 시작되어 12시에 끝이 나고, 친구들과 편의점이나 분식점에서 점심을 사 먹고 나면 비는 교실에 모여 다시 자습을 시작했다. 방학이라 학원에서 더 시간을 보내도 좋고 집에 가도 괜찮았지만 우리는 어울려 있는 것이 좋아 자습을 놀이처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용히 앉아 수학 문제를 풀거나 그날 배운 영어 단어를 외웠다. 주말에도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비슷한 시간에 나와 보면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거의 일주일 내내 붙어 다니던 학원 친구와의 관계는 학교 친구보다 더 가까웠다. 그중에는 오토바이를 탈 줄 알고, 싸움을 잘하면서도 공부도 반에서 1등 하던 친구 B군이 있었는데, 그는 나보다 훨씬 어른처럼 느껴졌다. 나보다 한 살 위인 친척형을 보던 눈으로 그를 쳐다봤던 것 같다. 딱히 그가 되고 싶다기보다는 그처럼 금기를 깨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것이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그러다가 나도 그처럼 오토바이를 타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었다.



중3 여름방학의 어느 날이었는데, 집에서 학원에 가는 길이었는지, 학원에서 집에 가던 길이었는지는 정확히 생각나진 않지만, 내가 향하고 있는 방향이 집과 같은 방향이었던 것으로 보아 집에 가는 길이었던 것 같다. 더위가 한참 시작되던 날로 기억하는데 햇볕이 따가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땡기는 날인 것만은 확실하다. 뒤에서 구루룽- 소리가 멈추더니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 처음엔 날 부르는 소리인지 몰랐다. 아니 모르고 싶었다. 오토바이에서 누군가 나를 부른다는 건 아마도 동네에서 종종 출몰하는 불량배일 확률이 높았기에, 쿵쾅 거리는 심장 소리를 숨기고 못 들은 채 가던 길을 계속 가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한 번 더 날 불러 세웠다.

"야, 반장", 그전까지 난 반장 소리가 그렇게 안심이 되는 단어인 줄 몰랐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적어도 해코지 당할 일은 없겠다 싶어 뒤를 돌아보니 그는 중1 때 같은 반이었던 D군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중1 D군의 모습은 순박했다. 그냥 평범한 같은 반 친구였는데, 어쩌다 본 중2의 그는 교복 바지 밑단을 과감히 줄인 소시지 바지에 머리는 더 과감한 색으로 물들인 동네 노는 형이 되어 있었다. 지금의 그는 중2의 소시지 바지와 노란 머리는 없었지만 오토바이에 올라타 있었다.

"너, 나 알지?", 그는 혹시 몰라볼지 모른다는 생각에 내 기억을 흔들어 깨우려 했다.

"당연히 알지. D, 잘 지냈어? 진짜 오랜만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 내 안도감은 심지어 안부를 물을 만큼 간사해졌다.

"뭐 그렇지." 알면서 뭘 묻냐는 듯한 그의 말에 난 별 말을 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중2 때의 날 본 적 있잖아. 그때랑 같아. 그렇게 흘러온 거지 뭐.' 알면서 뭘 묻냐는 식이 아니었을까.

"탈래? 태워줄게", 그는 나에게 쇼바를 한 껏 올려 튜닝한 롤러코스터 같은 뒷자리를 내주려고 했다. 난 안전과는 거리가 먼 그 자리를 쳐다만 봤다.

"이 오토바이 네 거야?", 왜 이렇게 물었는지 모르겠지만, 난 타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당연히 내 거지. 타봐, 재밌어. 천천히 달릴게", 오토바이 타는 것 정도는 별 거 아니라며 안심시키려 했다. 딱 봐도 그는 날 배려하려는 눈치였다.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다음에, 다음에 태워줘. 지금은 학원 가는 길이거든."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핑계를 대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는 것과 학원 가는 길이라는 건 무슨 상관관계가 있냐는 말이다. 난 노는 아이가 아니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하지만 이 대답으로 그는 알았을 것이다. 그의 배려에도 나는 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어쩌면 처음부터 D군은 아예 타지 않을 나를 알아봤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나에게 오토바이를 태워주겠다고 말했을까? 오토바이는 끌고 나왔는데, 약속은 없고, 심심하던 차에 내가 얻어걸린 걸까? 그는 학원까지 태워주겠다고 한 번 더 물어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사코 거절을 했고,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알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엉덩이를 잔뜩 치켜든 채 손목을 비틀어 부아앙- 골목을 따라 난 큰길을 달려 나갔다. 나는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상상했다. 나는 생각보다 왜소했던 그의 등허리를 잡고 있었다. 지금 보는 저 엉덩이가 내 엉덩이가 되어 핸들을 꺾는 방향으로 이리저리 춤추고 있었다. 빠른 속도 탓에 가만히 자리를 지키던 공기가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바람 한 점 없는 더운 날이었는데도 바람이 일어 머리카락을 날렸다. 상상만으로도 시원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B군이 떠올랐다. 만약 B군이 나에게 오토바이를 태워주겠다고 했다면 나는 D군에게 했던 것처럼 이상한 핑계를 대고 거절했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했던 상상은 실제가 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오토바이가 주는 위험한 스피드에 빠져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서 상상했던 바람을 느껴보려 선풍기에 얼굴을 디밀어보았다. 생각만큼 시원하지 않았다. D군의 오토바이는 이보다 더 빨랐을 것이다. 바람이 얼굴뿐 아니라 온몸에 느껴졌을 것이다.



나에게 들이닥친 '할까'와 '말까'의 세력 다툼에서 '할까'의 승률은 매우 낮다. 중3 때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많아 '말까'가 이기는 일이 흔했고, 지금은 해야 하는 일인데도 귀찮고 힘들어서 '말까'를 선택하는 일이 더 많다. 얼마 전 친했던 전 직장 동료와 캠핑을 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모닥불을 피워놓고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이 사십에 진로 고민이라니 믿기지 않겠지만, 중3, 고3, 대학교 졸업반보다 더 심각하게 절실한 것이 지금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이력서, 경력기술서, 자기소개서를 써놓고도 지원할 회사를 찾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계속하자니 이미 너무 고인물이고, 새로운 일을 하자니 쌩 신입이고. 마흔에게 신입이라는 타이틀은 잘 주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연봉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생활비, 대출 이자, 저축까지 돈 들어갈 구석이 너무 많은 나이가 된 것이다. 우린 누군가 이끌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무엇이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잘할 자신은 있는데, 믿고 써줄 회사를 찾을 수가 없으니 우리를 잘 아는 누군가가 회사를 차려서 적재적소에 우리를 잘 활용해주길 원하는 것이다. 이런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며 난 B군의 오토바이를 떠올렸다. 지금 B군이 다시 묻는다면 아마도 '그래 한 번 해보자' 말할 것이다. 흔쾌히 그의 못 미더운 오토바이에 올라탈 것이다. 무엇 하나 같이 해보자는 사람이 없는 지금, '범생이는 이런 거 하는 거 아니야'라며 지켜주던 B군보다 '뭐 어때? 한 번 해볼래?'라며 기회를 주던 D군이 더 고맙고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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