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살 나의 영웅

by minmin


여느 때와 같이 놀이터에서 쭈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쭈는 미끄럼틀을 타다 말고 간식을 담아온 가방을 뒤적거려 어제 산 막대사탕을 기어코 찾아냈다. 사탕이 워낙 커서 집에 가서 먹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쭈는 꼭 지금 여기서 이 사탕을 먹어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원래는 이렇게 큰 막대사탕을 간식으로 챙기는 법이 없다. 최근 사귄 쏘이라는 친구에게 전해주기 위해 산 사탕도 있어서 함께 가져왔던 것이다. 한 번 더 설득해보려 했지만 쭈의 입장은 완강했다. 요즘은 더 자주 옛날 생각을 한다. 정확히는 여섯 살의 나를 기억해내려 노력한다. 사실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여섯 살의 나는 잘 참았던 것 같다. 여섯 살짜리가 뭘 안다고 그렇게 참기만 해야 하나 싶어 “사탕이 맛있긴 하지, 그래 먹어도 되는데 반만 먹어.”라며 허락해버렸다. 최소 세 번은 권했으니 내 할 일은 다 했다 생각했다. 건강이나 신체에 위협이 되는 일이 아니라면 굳이 막아설 이유가 없다는 게 박하와 나의 입장이다. 사탕 좀 먹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고, 지금 먹으나 나중에 먹으나 먹는 건 매 한 가지이니까 별 상관은 없다. 사탕을 맛있게 빨아먹는 쭈에게 무슨 맛이냐고 물었다. “여기는 레몬 맛, 여기는 잘 모르겠는데 조금 달라.” 아이의 대답은 생각보다 구체적이었다. 여섯 살의 나 같았으면 그냥 레몬 정도로만 대답했을 것 같은데 여기저기 새로운 맛을 감지해내니 기특했다.



사탕을 빨던 쭈와 그 모습을 기특하게 바라보던 내 옆으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 둘이 킥보드를 타고 왔다. 킥보드가 색만 다른 같은 회사 제품인 것으로 봐서 남매인 것 같았다. 남자 애는 까불까불, 여자 애는 그런 남자 애를 웃으며 쳐다봤다. 그러다 남자아이가 진작에 먼저 와서 그네를 타고 있던 아이들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발음이 뭉개져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는데, 반복해서 들어보니 ‘아저씨- 아줌마-’라는 것 같았다. 그네 위 아이들도 그에 지지 않고 반박했는데 그 소리는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추측해보자면 우리가 왜 아저씨 아줌마냐는 말이었던 것 같다. 급기야 우리 옆에 있던 남자 애는 ‘할아버지- 할머니-”라며 껑충껑충 뛰었다. 엉덩이를 흔들기도 하고 손을 꺾어 보이기도 했다. 온몸을 저렇게 쓰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요란스러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저 형 이상하다며 쭈와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그네를 타던 여자 아이가 자기 얼굴만 한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왜 아저씨, 아줌마!"
"왜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함?"
"너 몇 살?"


당연히 서로 아는 사이인 줄 알았다. 그렇지 않나?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저렇게 놀려댈 수 있을까? 으레 처음 보는 사이엔 벽이 있기 마련이다. 같이 노는 것 같지만 몇 발자국 떨어진 곳을 자신의 활동 영역으로 정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온몸으로 놀려대던 저 남자 애한테서는 전혀 그런 게 느껴지지 않았다. 급기야 놀림을 당한 여자 아이 입에선 신고라는 단어가 나왔다.


"신고. 계속 그러면 신고함."


예상치 못한 단어에 나는 두 눈이 번뜩였다. 정말 현명한 단어가 나왔단 생각에 이들의 결말이 궁금해졌다. 저 남자 애는 꼬리를 내리고 하던 짓을 멈추게 될까? 아니면 그깟 신고 별 것 아니라며 하던 행동을 계속할까?


그네 위 여자아이는 나와 쭈가 다니는 동네 놀이터에서 항상 봐왔었다. 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정말 멋진 아이라고 생각했다. 깡 마른 몸에 길쭉길쭉한 팔과 다리, 작은 머리. 또래 아이들과 함께 서 있으면 존재감이 더욱 남달랐다. 그네 위에서의 활약을 보고 있자면 더더욱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 아이는 있는 힘껏 도약해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을 만큼 높이 날았다. 그네가 앞으로 90도, 뒤로 90도, 도합 180도를 오르내렸다. 동네에서 그렇게 그네를 타는 아이는 유일했다. 이런 멋있는 아이의 입에서 신고라는 단어가 나왔는데도 남자 애는 낄낄 대고 웃을 뿐 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네 위 여자아이는 소리를 지르며 휴대폰을 앞세워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달려왔다. 그리고는 왜 자꾸 놀리냐고, 너 계속 이러면 신고할 거라고, 우리가 왜 할아버지냐고, 온 힘을 다해 악을 썼다. 그 사이 같이 그네를 타던 남자아이가 다가와 뒤에서 지켜주었다.


"아닌데, 할아버지라고 안 그랬는데, 아저씨라 그랬는데."


여자아이는 통화버튼을 누르는 시늉을 하며 사과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 뒤에도 남자 애는 너네도 같이 놀리지 않았냐, 신고했는데 왜 사과를 하냐며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고, 여자 아이는 사과하지 않으면 진짜 신고해서 너네 엄마, 우리 엄마, 경찰 다 불러낼 거라며 사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으니 여자 아이는 휴대폰을 귀에 대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진짜 신고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그 사이 남자 애는 웃으며 장난을 쳤다. 전혀 심각하지 않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반성의 기미를 보일 거라는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오히려 심각한 건 같이 있던 여자 애였는데, 그러게 사과하지 그랬냐며 남자 애의 장난을 받아주지 않았다. 자꾸 장난을 걸며 웃는 남자 애의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무슨 말이든 해주고 싶었다.


'너, 대단하다. 전혀 쫄지 않는구나. 와- 인정. 중학교 올라가면 형들한테 엄청 맞겠다. 사과해라. 기회가 있을 때 사과하는 게 좋을 거야. 나중엔 사과하고 싶어도 못할 테니까. 저 누나 엄청 멋진 사람이야. 너한테 사과할 기회를 계속 주잖아. 세상에 저런 사람 없어.'


내가 하려는 말들이 너무 꼰대 같기도 하고 저 남자 애가 들어먹을 것 같지도 않아서 말하지 않기도 했다. 저런 애는 그냥 멀리하는 게 상책이다. 어릴 때 얻었던 교훈이다. 어른이라고 다를까. 어른이든 어린이든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어디든 있다. 좀 있으니 여자 아이가 돌아왔다. 엄마와 통화하고 온 것 같았다.


"너 이거 사과해야 돼. 진짜 신고할 거야."
"이미 했잖아. 했는데 뭐."
"아니, 아직 신고 안 했다고. 이제 신고할 거라고."


여자아이는 울먹거렸다. 울먹거려서 목소리가 떨릴 뿐이지 메시지가 흔들리진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한 힘을 뿜어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지금, 하. 니가 사과했으면 내가 엄마랑 통화할 일도 없고 신고도 안 해도 되잖아. 왜 사과 안 해! 니가 잘못했잖아. 니가 먼저 놀리기 시작했잖아. 사과해. 사과해야 돼. 안 그러면 진짜 신고할 거야. 신고해서 너네 엄마랑 경찰이랑 다 부를 거야. 빨리 사과하라고."


"미안해."


말도 안 돼. 남자 애가 사과를 했다. 들릴 듯 말 듯 아주 낮고 작게 말했다. 진짜 미안해서 사과한 건 아니고 다음에 이어질 상황이 두려워서 사과한 것 같았다. 여자 아이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한 사과였을 것이다. 그래도 사과는 사과였다.


"너, 다음부터는 진짜 그러지 마. 진짜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이번엔 그냥 넘어가는데 다음엔 안 봐줘. 바로 신고할 거야."



이렇게 싸움은 끝났다. 멋진 승부였다. 피해자가 이기는 게임을 본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11살의 나는 놀림에 속수무책이었다. 뭐라 한 마디만 들어도 울며 자리를 피했다. 분명 당한 건 나인데 내가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행동했다. 내일도 여자 아이는 그네 위에서 날고 있을 것이다. 다시 만나면 말해주고 싶다. 욕을 하지 않고도 사과를 받아내서 멋지다고, 피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줘서 고맙다고. 11살의 나에게 영웅이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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