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엔 로스팅에 과몰입한 사장님 내외가 살고 있다

by minmin


얻어먹는 밥이 제 돈 주고 사 먹는 밥보다 맛있고, 다른 사람이 차려준 밥이 직접 차려 먹는 밥보다 맛있지만, 커피는 다르다. 사 먹는 커피가 맛있고, 이천 원짜리보다 오천 원짜리가 더 맛있다. 그러니 공짜 커피는 더더욱 맛이 없을 가능성이 많다. 밥과 반대다. 얻어먹으면 그 맛을 평가절하하고, 싼 커피는 원래 맛이 없고, 비싸면 비싼 값을 한다며 당연한 듯 여긴다. 정말 맛있는 커피를 먹으려면 잘 알려지지 않은 카페에 혼자 가서 제값 주고 먹어야 한다.



커피 얻어먹으러 가는 길, 일부러 가장 가벼우면서도 따뜻한 옷을 입었다. 멋있으려고 입은 건 아니지만 이런 차림도 의외의 멋이 풍기는 것 같아 걸으면서 계속 자신감을 찬 바람에 날려 보냈다. 아마 뒤따라 오던 사람이 내가 뿜어내는 멋짐을 받아다가 중2들에게 가져다주면 모두 이찬혁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질과 양(질량)이었을 것이다. 커피를 얻어먹는 일도 물론 기분이 좋을 수 있지만 이보다 더 나를 들뜨게 하는 건 바로 로스팅에 과몰입한 사장님 내외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약 1년 전쯤 아내가 동네에 로스팅 전문점이 있다며 원두와 드리퍼를 사 왔다. 사장님의 자부심에 잡혀서 한참 이야기를 듣고 왔다고 한다. 가비라고 노란색 영문이 새겨진 드리퍼 세트를 꺼내 조립하면서 사장님이 지금까지 써본 것 중 최고라며 추천해 줬단다. 그리고 사장님이 프린트해준 A4용지를 꺼내 드러퍼 사용법과 주의사항을 보여줬다. 별 게 있는 건 아니고 처음 드리퍼를 써보는 사람들을 위해 방법을 적당히 적어둔 것이었다. 드리퍼는 예전에도 써본 적이 있다. 커피 학원에서 커피 머신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는 집에서도 맛있는 커피를 먹고 싶은 마음에 구매해 한참 썼지만 모카포트가 생긴 이후엔 선반에 모셔두었다. 그래서 아내가 사온 드리퍼를 본 내 반응은 시원찮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그런 마케팅에 속았구나 싶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날 아내가 사 온 드리퍼가 우리 집에서 LG 코드 제로보다 더 바쁘게 활동 중이다. 한 때 우리 집 최애였던 6인용 대용량 모카포트를 시대의 유물로 만들어버린 사장님은 내가 자주 가던 던킨(가장 일찍 문을 여는 곳이어서 가는 것뿐 커피가 맛있어서 가는 건 아니다) 근처에서 무인 원두소매점을 운영 중이다. 말이 무인이지 항상 사장님 내외가 상주하며 원두를 직접 볶는다. 처음엔 아내가 퇴근길에 원두를 사 왔지만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고 나면 갈 곳이 없는 내가 동네 마실 삼아 다녀오기도 한다.


나의 첫 방문엔 비가 참 많이 내렸다. 근처 카페에서 정신없이 원고를 마감하고 나니 비가 꽤 오기 시작했다. 더 오기 전에 맛있는 원두를 골라 집에 갈 생각이었는데, 사장님이 커피 한 잔 내려준다기에 그럼 잠깐 앉아 비를 피하기로 했다. 사장님은 내가 바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스로 드릴까요? 따뜻한 걸로 드릴까요? 산미 있는 걸 좋아하세요? 없는 걸 좋아하세요? 과일향이 나는 것도 괜찮으세요? 평소 커피를 진하게 드세요? 아니면 연하게 드세요?’ 정도를 예상했다면 정답. 이 정도로 마무리되었으리라 예상했다면 오답이다.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장님의 기억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기억이 연어도 아니고. 어디까지 갔냐면 갓 지어낸 밥처럼 가장 맛있을, 갓 가지게 된 취향의 맛에 취해 무모한 짓까지 했던 이 모든 일의 시작에까지 이른 것이다. 사장님은 집에서 그것도 그냥 프라이팬으로 커피를 볶았던 그때를 회상했다. 아파트였는데 집 안 전체가 몽땅 연기로 가득 찼다고 했다. 한 겨울이었는데 아이들 옷 챙겨 입히고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재웠다고 했다. 그 무모함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사장님에게 물었다. “아내 분께서는 뭐라고 안 하셨어요?”


그다음 방문에는 여자 사장님을 만났다. 사장님은 상냥했다. 상냥하게 커피를 소개했다. 상냥하게 커피를 사랑했다. 사냥하게 어마어마했다. 평소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 많았다. 아마도 공통점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지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자신의 가게를 찾아온 손님을 대하는 자본주의의 친절함은 분명 아니었다. 사장님 내외는 모두 커피에 함께 빠져 여기까지 온 게 확실했다. 프라이팬으로 커피를 볶아 집 안 전체를 연기로 가득 채웠던 그 무모함을 함께 저질렀다는 걸 확신했다. 아, 이런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었구나. 나에게 필요한 이들이다. 한 가지에 과몰입할 줄 아는 사람, 어디에 어떻게 힘을 써야 하는지 아는 사람, 무모할 줄 아는 사람. 무모하게 한 가지에 빠져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 그러니 내가 커피를 얻어먹으러 가는 이 길이 신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닥을 보이는 200g짜리 원두 봉지만큼 가볍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짜 커피는 맛이 없다. 원두 보관 상태가 좋지 못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장님의 커피는 다르다. 한 번도 같은 향을 가진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다. 먹고 나서도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과일과 허브향이 코로 전해지는 걸 보니 위에서 소화된 커피의 맛과 향이 몸속 깊이 스며드는 게 확실하다. 게다가 사장님의 커피에는 쓰는 물이 다르다. 커피 머신 또한 고객님의 것이 아니라 사장님의 것이다. 자기 것이 더욱 철저하게 관리할 거란 말이다. 오늘 이 사장님의 공짜 커피는 참 향긋했다. 다음 달에 먹게 될 공짜 커피 또한 그럴 것이 확신한다. 그러니 오래오래 한 동네에서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