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 예수님

by minmin


펌을 하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내 새둥지는 이미 감당할 수 있는 한계점을 넘겨 버렸다. 머리카락을 아무리 정성스럽게 말려도 마치 모자란 앞머리숱을 가리기 위해 윗머리를 사용한 김 부장님처럼 비겁해졌고, 시간이 지나면 윗머리가 차분히 가라앉아 <공각기동대> 공안 9과 아라마키 다이스케 과장처럼 옆머리가 더욱 우람해졌다. 그래서 모자를 썼더니 굵고 무성한 새둥지 숱을 이기지 못하고 모자 양 옆으로 삐져나와 오즈의 마법사 허수아비가 되기도 했다. 그동안 아침마다 참 많은 인물로 변신했더랬다. 벼르고 벼르다, 아니고 참고 참다가 겨우 두 달을 채우지 못하고 이른 아침(이른 아침이라 해봐야 아이가 어린이집 간 다음이니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 미용실에 등장한 것이다.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의 끝을 잘 말아 세팅한 실장님이 나를 맞아주었다.



우리는 그를 예수님이라 부른다. 그 길고 가느다란 키, 팔과 다리, 손가락과 더불어 그의 헤어스타일 때문에 지어진 별명이다. 한때 우리 가족의 헤어를 담당했었다. 과거형으로 쓴 이유는 한 1년 정도 휴지기 동안 그를 대신할 다른 미용사를 찾았기 때문이다. 아내와 아이는 다른 여자 미용사에게 머리카락을 맡겼지만 나만은 그럴 수 없었다. 예수님이 이 미용실에서 사라진 후 나는 한동안 그가 거처를 옮겼을 거란 생각에 검색에 몰두했지만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한 달 전 우연히 미용실 옆 문구점에 들렀을 때 그가 원래 있던 그 자리에서 손님을 맞는 걸 발견한 것이다. 1년 정도의 휴지기를 가졌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된 사실이다. 미용실이 넘쳐나는 지금 세상에 그만을 애타게 찾았던 이유는 일하는 스타일 때문이다. 일단 실력을 확신하지 않는다. 원하는 스타일을 잘 듣고 똑같이 나올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똑같진 않아도 느낌이 살도록 머리카락을 만져준다. 그가 만져준 머리카락은 시간이 지나도 어느 정도 스타일이 유지된다. 헤어 디자이너라면 다 그럴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이렇게 일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보통은 실력을 감추기 위해 지나치게 친절하거나 실력을 뽐내기 위해 지나치게 말이 많다. 당장은 내가 내민 사진과 똑같은 스타일을 만들어 주지만 집에 와서 혼자 스타일링을 해보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도 한다. 스타일을 위해 지나치게 숱을 많이 쳐낸 머리카락은 당장 일주일만 지나도 불규칙적으로 자라나 속을 썩이게 된다. 그러니 정말 실력 있는 헤어디자이너는 연예인의 스타일을 똑같이 만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 머리카락의 상태를 고려해 연예인의 느낌을 살려내고, 그 스타일이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내 머리카락의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매번 내 머리카락을 새의 것에서 사람의 것으로 탈바꿈해 주는 예수님은 이번에도 별 말이 없다. 내 머리카락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듯 바라보고 들춰 본다. 3년 전 허리 중간까지 기르던 머리카락을 잘랐던 그 손님, 2년째 권정열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펌 해주세요’ 했던 그 손님, 두 달 전에 나타나 내 안부를 물었던 그 손님이 다시 왔음을 기억해 냈을 것이다. 난 고개를 까딱, 인사를 하고 “다듬으려고요, 머리카락이 너무 길어서 말을 듣지 않아요.”라고 했다. 사실 내 머리카락이 더 엉망이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첫째,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내 마음대로 무찔러 버렸다. 그것도 일자로. 펌이 그때까진 살아있던 터라 그렇게 이상하진 않았는데 앞머리가 축 늘어지니 일자로 잘진 머리카락이 더욱 빛을 내며 존재를 뽐내게 되었다. 둘째, 흰머리를 감추기 위해 집에서 염색을 했는데, 뿌리만 염색하기 힘들어 전체를 검게 물들여버린 것이다. 덕분에 제법 스타일리시하게 말려 있던 머리카락이 지저분하게 풀려버렸다. 셋째, 점점 부풀어 오르던 옆과 뒤쪽 머리를 숱가위로 두어 번 쳐낸 일이 있었다. 뭉터기로 떨어져 나가는 머리카락에 겁을 먹고 중간에 그만두었지만 이상하게도 부조화스러웠다. 이런저런 일들이 합쳐져서(이럴 때만 내가 가진 것들은 시너지를 내버린다.) 지금의 새둥지가 된 것이라고 다 말할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아 앞의 두 개만 이야기하면 머쓱하게 웃었다. 마스크 덕분에 머쓱함의 반 정도는 숨길 수 있어 다행이었다.



결혼하기 전 아니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엄청 까탈스럽게 헤어를 관리했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컷팅엔 무척 예민하게 반응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알주일만 지나면 다시 자랄 머리카락, 아침마다 모자로 엉클어진 머리카락을 가리는 게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번에도 예수님은 약 100여 번의 가위질로 세상으로 나올 수 있게 내 머리를 구해주었다. 아무리 두꺼운 곳을 입어도 커버되지 않던 좁은 어깨가 작아진 머리 덕분에 얇은 티셔츠 한 장만 입어도 충분히 넓어 보였다. 당분간은 기분이 계속 좋을 예정이다. 머리카락 좀 잘랐을 뿐인데 좋아진 기분을 느끼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성형을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헤어컷으로 좋아진 기분은 길어봐야 4주? 그렇다면 성형은 헤어컷보다 10배 정도는 더 오래 지속되지 않을까? 10배면 40주니까 한 달을 4주로 치면 약 10개월 정도. 좋은 기분이 다 소진되고 나면 머리카락 자르듯 또 하고 싶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중독이 되는구나 싶다. 아무튼 지금은 카페. 그냥 들어갈 수 없지 않은가. 지금부터 내 기분은 하루가 지날 때마다 반씩 줄어드는 반감기를 맞이해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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