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 나는 완벽했다

by minmin




거울 속 나는 완벽했다. 두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두 손으로 옷을 쥐고 있었으며, 두 발로 당당히 땅을 밟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보이지 않는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병원에서는 온갖 병명들로 나를 구분한다. 카페에서는 내가 마시는 커피로 나를 판단한다. 빵집에서는 내가 고른 빵으로 나를 기억한다. 일주일에 두어 번 방문하는 정육점에서는 내가 사는 고기의 종류로 나를 파악한다. 모두 눈에 보이는 것들로 나를 파악하는 것이다.



멍하게 테이블 위를 응시한다. 갑자기 테이블 위에 커피 두 잔이 생긴다. 꼭 잡은 두 손도 보인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두 사람이 의자에 앉아있다.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지금 막 시작된 사랑이 오고 간다. 다시 빈 테이블과 의자만 남는다. 상상은 눈에서 사라진다. 나는 누군가의 상상이 만든 존재일 수도 있다. 그 누군가는 나일 것이고, 나는 디벨롭되지 않은 롤 속 한 줄의 필름처럼 상상하는 일을 계속 이어간다. 결국 나는 되고 싶은 것을 상상하고, 상상한 대로 나의 기억에 남긴다. 조물주가 나에게 외모와 성격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한 것이었다. 마음이 뻥 뚫려버린 것처럼 느끼는 것은 완성되지 않은 나의 상상 때문이다. 나는 어떤 곳을 향해 가는 사람인가. 나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상상은 기본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형과 태을 부여하는 눈속임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은 형태가 온전치 않기 때문에 쉽게 왜곡된다. 어떤 순간에는 따뜻한 가슴을 부여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따뜻함은 사라지고 불 꺼진 숱만 가슴에 남는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다면 따뜻한 적이 있었다고 느끼지만, 온기마저 사라진 후에는 불을 피운 적이 있었는지 의심한다. 퇴사 후 내가 정말 뜨겁게 일했는가를 의심하는 것과 같다. 분명 나는 뜨겁게 일했고 모두 불태웠지만 말이다.



대화는 남과 다른 점을 파악하는데 좋은 수단이다. 나를 정의하기 위해 상상하는 대신에 대화를 하는 편이 낫다. 나를 채우고 있는 것은 남과 다르다는 걸 대화를 통해 확실해진다. 그런데 대화가 주종관계를 이루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을 나에게 주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화에 나는 없고 상대방만 남는다. 나라는 존재에 구멍이 뚫리면 나의 공허함은 비슷한 파장의 주파수가 만나 큰 폭으로 오르내리듯 증폭된다. 이기기 위해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섞이지 않기 위해 공평하게 주고받아야 한다. 그래서 다른 부류의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것이 더 안전하고 활발하다. 비슷한 배경과 지식을 가진 사람의 대화는 편안하지만 섞여서 나의 생각인지 너의 생각인지 구분 짓기 힘들게 만든다. 나를 찾기 위해 대화를 해야 한다면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남이 아니라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 더 많지만 말이다.



다시 돌아와서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해보자.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는 있을까. 혹시 끊임없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건가.



이런 이야기를 누구에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