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분해된 공중곡예사

by minmin




뺏기는 것이 두려웠다. 어떻게 일궈놓은 연봉인데, 어떻게 쌓아놓은 명성인데, 10여 년간의 노력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은 없다. 지켜야 했다. 하지만 의지와는 정반대로 내 곁에 머무는 것은 많지 않다.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더 빠르게 사라져 가는 기분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건 힘들게 얻을 것에 대한 상실감보다 지키지 못하는 나의 무능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 인생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굳이 이런 식으로 확인해야만 했을까. 그렇다면 내가 잃은 것은 어디로 갔을까? 빌어먹을, 누구의 소유가 되었을까? 중요하다. 나보다 못하면 못했지 더 가진 사람한테 가는 것은 죽어도 싫기 때문이다.



사실 나로 인해 더 얻는 사람은 없다. 원래 없었던 것을 가진 것이고, 그렇게 가진 것이 사라진 것이니 누가 중간에서 가로챌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공중분해된 것이다. 공중에서 사라져 가는 것을 움켜쥐려고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꼭 공중곡예사를 닮았다. 저러다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상실이 주는 아픔보다 더 큰 부끄러움의 상처를 감추기 위해 벌떡 일어나려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허공에서 휘두른 팔과 다리는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허리는 반으로 꺾여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머리는 생각을 멈췄으니 그대로 공중분해된 것이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몸을 던진 슬픈 공중곡예사일 뿐 그들을 감동시키진 못했기 때문이다. 기억이 오래가려면 추억처럼 각인되어야 한다. 공중곡예사는 한순간의 즐거움일 뿐 그 이상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공중분해된 공중곡예사처럼 평생 타인의 즐거움에만 기여하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곡예가 즐거울까. 전혀 그렇지 못하다 해도 그것은 우리의 잘못만은 아니다.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는 음식을 만들고 커피를 끓이고 청소하는 것을 곡예라고 부르지 않는다. 버스를 타기 위해 찻길을 건너고 우산을 든 채 어긋난 보도블록을 뛰어넘고 사람 많은 지하철에 몸을 욱여넣는 행위가 오히려 곡예에 더 가깝다. 불편한 대화를 이어가거나 결말을 모르는 글을 쓸 때 몸이 아닌 정신의 곡예를 경험한다. 모두 누군가를 위한 것인 동시에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것은 곡예가 되고 어떤 것은 곡예가 되지 않음을 가르는 기준은 '네가 있고 없고'의 차이에 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나'에게로만 향하면 그것은 곡예가 아니고, 나뿐 아니라 너에게 향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곡예가 된다. 같은 행위라 해도 대상에 따라 곡예가 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위해 위험을 감수한다(몸을 던져 공중제비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남을 위해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한다. 결코 이타적일 수 없는 존재이면서 (비록 착각이지만) 나와 연결된 소중한 인연을 지키려 과감히 뛰어드는 사람, 바로 우리는 공중곡예사이기 때문이다. 자아실현을 위해 물불을 가지지 않고 달려들지만 결국 깨닫게 된다. 세계 최고의 공중곡예사와 같은 자아실현은 애초에 없다. 자아실현 아닌 자기만족일 뿐이고 자아실현을 위한 노력은 결국 타인의 즐거움을 위해 이용된다.



다시, 나는 나를 되돌아본다. 나는 누군가의 즐거움을 위해 몸을 던지는 공중곡예사인가, 누군가의 배설물을 기꺼이 삼키고 처리하는 공중화장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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