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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씨 Feb 06. 2021

호모 비아토르, 여행 권하는 시대

독한 사회가 사람들을 여행으로 내 몬다

나이 30이 넘고,

가정과 직장에서 맡아야 할 책임의 분량이 늘어나는 어느 한순간부터

어느새 여행 중독이 되어 버렸다.


주중에는 피로에 지쳐 저녁 약속 같은 건 엄두도 못 내고

회사와 직장을 시계추처럼 오가다가,

주말이 되면 남편, 아이들과 함께 다시 이 지겨운 집구석에 있기 싫어서

어디로든 차를 몰고 떠났다.


지쳐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쉽게 잠들지 못하는 일요일 밤을 보내고

월요일부터는 또 어김없이 회사. 


회사를 나가는 일주일 동안,
몸과 마음이 탈탈 털리는 순간이면
주말에 어디를 갈까 궁리하는 재미로 버텼다


전국 조용한 휴양림과 가성비 좋은 콘도란 콘도는 다 돌아다닌 것 같다.

펜션이 유행할 때는 펜션, 

에어비앤비의 시대가 오자 에어비앤비로 평점 좋은 곳들 위주로 또 휩쓸고 다녔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적어도 이년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했다.

몇 년을 별려서 유럽을 가거나, 아니면 가장 가성비 있는 대만이라도.

아주 기를 쓰고.


그리고, 이제 약간 가족과 직장이 주는 스트레스가 조금 정돈이 되자

여행에 대한 불타던 욕구가 다소 가라앉고

이제는 거울 앞에 돌아와 앉은 누이처럼

여행에 대해서도 관조의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리 여행에 광분하는가.

남들도 다 나 같은 이유일까.

나름 몇 달간 여기저기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찾아봤다.

그리고 나름 결론을 내렸다.

그래, 사실은 다들 비슷한 이유였어.


사회가 독해져서,
사람들이 탈출구를 찾은 게 여행인 거야  



바야흐로 여행 로망 대폭발의 시대다.

대학에 합격하면 지난했던 중고등학교의 시간을 잊어버리겠다는 듯이, 

회사 입사 통지를 받으면 지난 시간 노심초사를 한꺼번에 씻어버리겠다는 듯이, 

또 퇴직서를 던지면 마치 이 참에 인생을 리셋하겠다는 듯이 떠나고 싶어 한다. 


반대로, 도저히 이 일을 계속할 힘이 남아 있지 않는데도 계속해야 한다면, 

가여운 스스로를 보상해 주기 위해 호사스러운 여행, 정 안되면 호캉스라도 떠나거나 

혹은 재무장을 위해 극단적으로 결핍된 순례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신혼여행, 가족 여행, 친구들 여행처럼 둘 혹은 여럿의 화합을 위해 떠나는 

매우 전통적인 여행도 물론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10대 아이들도, 은퇴를 앞둔 세대도 

향후 시간이 생긴다면 뭘 제일 먼저 하고 싶냐는 질문에는 똑같이 ‘여행’이라고 외친다. 


심지어는 여행 갈 경비를 벌기 위해 평소에 일하는 것이므로, 

여행이 목적이고 일은 수단이라고 말하는 젊은 층도 있다. 

“장자의 나비” 스타일로 말하자면 여행하는 내가 진정한 나이고, 

일하는 나는 그냥 잠시 지나가는 꿈속의 나다.


여행의 반대말은? 일상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그 일상은 극심한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가족, 친구, 일터 같은 사회적 안전망은 점점 약해지므로 

한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인생의 무게감이 계속 커진다. 

일상의 스트레스가 높아질수록 탈출의 욕망은 높아지니까, 

당연히 여행에 대한 욕구, 니즈는 점점 커진다. 


저가 항공사, 공유 숙소 같은 저비용 여행 대안들의 등장으로 

여행 단가가 현저히 떨어지고, 반면 인터넷을 통한 공짜 여행 정보는 많아지니 

여행 여건은 점점 더 좋아지는 셈이다. 


소유보다는 경험에 더 투자하고 싶어 하는 글로벌 젊은 층의 성향에 더해, 

가혹하게 높아지는 한국의 부동산 구입 비용은 

상대적으로 여행 비용을 훨씬 더 저렴하게 보이게 한다. 


여행의 편의성과 효용가치는 점점 올라가는 반면에, 

소유나 정착하기 위한 비용은 갈수록 올라가니, 

여행을 자주, 많이 떠나는 게 일종의 합리적인 소비 행위인 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부러 고난의 순례길을 걷기도 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며칠을 머물기도 하며,

내가 사는 곳보다 10년 20년 뒤쳐진 작은 지방 도시에서 

시간 여행을 하며 순수했던 과거를 되돌아보는 향수를 즐기기도 한다. 


코로나 이후에도 당연히 이런 큰 여행의 트렌드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 시기에 경험한 캠핑, 차박 같은 체험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가면서

더욱 캐주얼하게 일상 속으로 파고든 여행을

아마도 줄기차게 하겠지.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뭐든, 집착하지 않아야 버틸 수 있는 세상이다.


야호, 여행이다. 여행은 출발할 때가 제일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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