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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씨 Nov 22. 2021

젠지 아들, 군대 보내기

울며불며 훈련소 들어간 녀석

입대 D-day까지 마음 졸이기

약간 겁쟁이인 우리 아들은 어릴 때부터 군대를 무서워했다. 

훈련받는 것도 두려워하고, 상명하복의 위계질서도 걱정했다.

그냥 대한민국 남자로 태어났으니, 억울하지만 갈 수밖에 없으니, 

너무 늦게 가면 힘들 것 같으니, 정말 억지로 억지로 가는 의무방어전이다. 


그런데, 이 ‘억울함’이라는 감정의 방점이
생각보다 매우 세다


그냥 나이가 차면 당연히 군대에 가려니 하고 받아들였던 우리 세대 사람들과는 너무 다르다.  

정말 진지하게 몸무게를 줄여볼까 고민하다가, 

어딘가 중요한 결격 사유를 만들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했다가, 

마지막에는 왜 누나는 안 가냐고 어깃장을 놓다가, 

친구들이 한둘씩 실제로 가는 걸 보더니 

겨우겨우 현실로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내가 뭐라고 한마디라도 할라 치면

“엄마는 군대도 안 갔다 와 놓고선.” 하고는 듣는 척도 안 한다.


2학년 2학기로 입영 날짜를 결정한 후, 별 관심 없는 부모와는 한마디 말도 없이 

또래 친구들과 부지런히 도 정보를 공유하면서 

부랴부랴 카투사 원서를 넣었다 떨어지고, 

의경 지원에 넣었다 또 떨어지더니, 

마지막으로 비장하게 통역병 원서를 넣었다. 


그 싫어하는 인강도 끊어서 한 달 씩이나 미리 공부도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시험 당일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왔다. 

통역 면접 시간에 무슨 소리를 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고, 안 될 것 같다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몇 주를 기다렸다. 

남편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일반병으로 가나 통역병으로 가나 기간도 같은데 뭐 대수냐고 짐짓 대범하게 무관심했다. 


그랬다가, 겨우 턱걸이로 용하게 붙었다. 는 이야기를 들었다. 

뭐, 원하는 대로 됐으니 엄마로서 일단은 기뻤다. 

아이와 남편의 기쁨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어떻게든 야전이 아니라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다는 그 소원이 이뤄진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날부터 벌어졌다. 

그때부터 이 아이는 이미 마음이 늘 군대 가기 전날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학교 앞 친구 자취방에서 잠을 자고 오는 일이 부지기수로 벌어졌다. 

코로나 시국에, 게다가 아직 1학기는 끝나지도 않았는데, 엄마의 마음은 계속 조마조마했다. 

군대 갈 날만 기다렸다. 


입대 당일 – 자기 물품은 오지게도 챙기는 맥시멀리스트

논산 훈련소로 향하는 날 아침, 

그동안 친구들한테 선물 받았다 뭐다 잔뜩 챙겨 놓은 물품들을 보고 기가 막혔다. 

상처용 밴드에 마스크는 애교, 무릎보호대와 어깨 보호대, 수면 안경에 귀마개까지. 

웬만한 배낭 하나는 차고 넘쳐서 커다란 쇼핑백에 한가득이다. 

잔뜩 짊어지고 논산역에 도착해서는 잊어버리고 안 산 것이 있다고 또 편의점에 가잔다. 

마스크 귀걸이까지 산다. 단체 생활하다 보면 마스크 헷갈려서 이게 꼭 필요하다고. 


아, 이 자기 염려증의 화신. 맥시멀리스트.


그래도, 뭐라 하기는 마음에 걸려서 하자는 대로 다 하고, 먹고 싶다는 한우까지 든든히 먹인 후

드디어 훈련소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잔뜩 짐을 짊어진 녀석이 우두커니 서서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린다. 

아, 속상해.


다른 훈련병들은 배낭 하나 짊어지고 눈물짓는 엄마들을 위로한 후 씩씩하게 잘만 들어가는 구만.

상황이 웃기기도 하고, 녀석이 짠하기도 하고, 황당하면서 뭐 심정이 복잡했다.

같이 울 수도 없고, 빨리 가라고 채근할 수도 없고,, 어정쩡하게 한 5분을 기다렸을까. 

드디어 결심한 듯이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든다. 

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눈만 바라보면서 웃어준다. 

돌아서서, 아무 말 없이 성큼성큼 걸어간다.

그렇게 길고 길었던 그날의 피크가 지나갔다.


요즘 아이들의 군대 계산법

주변에도 이제 아들 군대 보낸 엄마들이 몇 있다. 

한 명은 최전방 GOP, 한 명은 운전병, 또 한 명은 훈련소 조교로 복무하고 있다. 

모두 외국 생활 경험도 있고 어학 특기가 있는 아이들이었는데, 

본인들이 딱히 다른 대안을 원하지 않고 육군 현역병 지원을 했다고 한다.


특히, 최전방으로 간 아들은, 

평생 한번 체험하는 것인 것 제대로 해 보고 싶다고 하면서, 

최전방 GOP에 심지어 자원했다고 한다. 

조교로 남으라는 훈련소의 권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제야 요즘 그 또래 아이들의 마음이 좀 입체적으로 이해가 되는 듯도 싶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것, 이왕이면 본인이 원하는 경험으로 그 시간을 채우고 싶은 거다. 

그래서, 그 시간 동안 최대한 자기다움을 지키면서 살고 싶은 거다.


누구는 전방 철책의 경험으로 인생의 한 페이지를 채우고, 

누구는 사무실에서 행정병으로 회사 체험을 미리 해 보고, 

또 누구는 바깥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운송의 역할을 체험해 보기도 하고.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예전보다 인권의식이 많이 높아지고 정보가 투명해져서 억울한 일을 당할 가능성이 낮다는 점,

최저시급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제대로 모으면 나름 목돈이 될 월급을 받는다는 점.


훈련소에서 삐뚤삐뚤 써 보낸 아들 녀석의 손 편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울며불며 들어왔지만,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더군요” 

하던,

한껏 철들어 보이는 문장이었다.


늠름한 군인이 아니라,, 아직은 더 자라야 하는 청소년을 보는 심정이라 조마조마하지만,

그래도 이제 첫 시작은 했으니, 더 단단하게 성장해 나가길 바래본다.


길에서 군인을 보면, 이젠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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