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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씨 Jan 09. 2022

퇴사 일기

26년간 일한 회사와 작별하기

드디어 퇴사 신청


기다리던 연말이 왔다. 회사에 퇴사 신청을 했다. 

그리고, 디데이로 잡은 마지막 출근 날까지 고맙게도 2~3주가량 시간이 있었다. 

친하게 지내던 많은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했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밥을 같이 먹기도 하고, 적어도 차 한잔을 나누면서 소소하고 다정한 작별 인사를 나눴다. 다들 시원섭섭할 것 같다고 했다. 섭섭하다는 말을 기대하는 듯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무심하게 말했다.


 “너무 오래오래 곰탕을 끓여서 이제 우러날 게 없어요.

 섭섭함보다는 자유가 된다는 설렘이 더 큰데요”


물론 진심이 아니었다

섭섭한데 떠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그냥 논리적인 대답을 한 것뿐이었다.


물이 고인 듯 정체된 회사 분위기나,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도돌이표처럼 반복하는 여러 후배들의 넋두리, 그리고 코드가 맞지 않는 몇몇 사람들과 안녕한다는 것은 시원하기도 했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던 이 일 그리고 마음을 맞춰 함께 일하던 동료와 후배를 떠난다는 것은 가슴 한편을 도려내는 것처럼 서늘한 아픔이 있다. 


그냥 추상적으로 느껴지던 이 섭섭한 마음은 마지막 출근 전날 피크를 찍었다. 

오랫동안 컴퓨터를 바꿔가면서 계속 쌓아왔던 나의 파일들을 주욱 훑어보는 순간이었다. 




 마이 베이비, 파일들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실감한 순간

구두를 만들던 사람이 제화 방을 그만두면 아마도 자기가 만든 신발들을 아련하게 볼 것이다. 

내 가장 소중한 시간과 노력의 결과물들. 말하자면 자기 분신. 또 다른 나.


그게 나한테는 아마도 내 컴퓨터 속 기획서 파일들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완성품뿐만 아니라 그 만들어 가는 과정들. 팀원들이 힘들게 만든 초안들, 서로 오갔던 시놉들, 

기획서로 만들었지만 누군가의 리뷰에 까이거나, 혹은 광고주 피드백에 맞춰 몇 번이고 수정하는 바람에 final이라는 이름을 여러 개 달고 있는 최종 파일들. 


십 수년간 프로젝트 리더로 연간 20개 이상의 일들을 했으니, 못 잡아도 200여 개의 폴더들에 

파일이 하나 가득이다. 

물론 가져갈 수도 없다. 내가 만든 소위 “지식 산출물”들은 법적으로 회사 소유이다. 

하지만, 회사도 보관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 사용자를 위해 파일은 삭제당하고, 컴퓨터는 리셋당하겠지.


내일이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내 새끼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니, 심장이 벌벌 떨렸다.

그러다가 움칫 놀랐다. 

아무도 이런 말을 해 주진 않았어. 제기랄.

플래너 직업병인가? 

설마 나만 유난을 떠는 건 아니겠지? 

이 갑작스럽게 주체 못 할 감정을 어떡하지?




마지막 진실의 순간

이렇게 슬퍼할 거 왜 떠나니? 하고 누군가는 묻겠지.

그러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나이 든 것을 부끄럽게 만드는 회사에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으니까.

혼자 정신 승리하면서 괜찮은 척하기에는, 눈치도 빤하고, 부끄러움에 민감한 스타일이라서.


나의 믿는 구석

하지만 나는 원래 과거에 연연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영국으로 중국으로 해외 발령을 받고 한국을 떠날 때도, 다시 돌아와 자리를 잡았을 때도 

담담하게 물 흐르듯이 잊을 건 잊고, 남길 건 남기고, 감정관리를 잘하는 편이었다. 

감성적인 인사를 던지는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씩 웃으며 “있을 때 잘하지”라고 말하는 스타일. 

그리고, 실제로도 지나고 나면 금세 잘 까먹었다. 

그러니, 지금 잠깐 그럴 뿐이다. 

지나고 나면 금방 괜찮아질 거다.


 그리고 마지막 허세

누군가가 퇴직금을 많이 받기 위해 마지막 3개월 동안 없는 일도 쥐어짜서 야근에 특근을 몰아서 하고, 보통의 액수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챙겨간 이전 퇴직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너도 이왕 이렇게 결정한 거, 최대한 쥐어짜서 나가라는 투였다. 

하지만, 오히려 확신을 줬다. 

그래, 그런 식으로 이름이 남는다는 건 최악이다 

나는 내 인생의 절반을 보낸 이 회사에서,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다. 

그게 마지막 남은 나의 가장 큰 욕심이고, 바보 같은 허세다. 

끝까지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했고, 잘해 냈고, 무엇보다 모든 사람에게 진심으로 대했다고. 

나는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어쨌거나 나답게 일하고 나답게 마무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이제 이 회사의 문을 당당하게 나설 거고, 

그리고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이곳에서의 불필요한 기억들은 잊을 것이다.


그림자는 길게 드리우지 말자, 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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