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여자?
“스물여섯 살 결혼 후, 18년간 시어머님과 같이 살았음”
이렇게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우와 정말 착하다. 요새도 이런 사람이?” 한다.
글쎄, 내가 착한 사람이라기보다는,,,
난 그냥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요즘 사람이었을 뿐이었습니다만?
따뜻한 첫 만남, 집밥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스무 살 이후 고향을 떠나 대학 4년 그리고 취업 2년간 자취를 했다는 사실이다.
살림이나 요리 같은 건 하나도 배우지 못하고 그냥 독립에 대한 막연한 꿈만 가지고 시작한
자취 생활은 하나도 만만한 것이 없었다.
당시 뜻과 시점이 맞아 2년 정도 같이 동거를 했던 선배 언니들이 후일담으로
“깔끔하게 살림 잘할 것 같은 외모”와는 달리
집안일에 관심이 너무도 없어 깜짝 놀랐다고 증언할 정도로 나는 “살림 무능력자”였다.
그렇게 삭막하게 20대 초반을 보낸 나는 어여 따뜻한 가정을 만들고 싶었지만,
막상 살림에 대한 부담은 만땅이었다.
그런데, 마침 만나던 당시 남자 친구가
아버님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님 혼자 사신다,
게다가 손맛 좋다는 전라도 남원 출신에 과거 식당 운영도 하셨다 하니까 귀가 번쩍 뜨였다.
이건 하늘의 뜻이 아닌가.
처음으로 집으로 찾아뵌 날,
인정 많아 보이는 외모에 과하지 않은 관심,
깔끔한 세간살이에 맛있는 집밥.
어머님은 어머님 나름대로 나를 평가했겠지만,
나도 마음속으로 나름 예리한 평가를 하고 있었다.
같이 살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며칠을 생각하고 결론을 내렸다.
같이 삽시다!!
돈은 남편과 제가 벌겠으니,
저희 부부의 아내가 되어, 따뜻한 내조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요렇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내 간절한 바람은 진실로 그러하였다.
20대 신혼의 위기, 30대 철저한 업무 분장
물론 처음부터 잘 돌아갔던 것은 아니다.
부부가 처음 만나 사는 것도 힘든데, 게다가 시어머니까지.
특히 주말이 되어 하루 종일 집에 같이 있기는 매우 힘들었다.
그렇다고 늘 나가서 우리끼리 시간을 보낼 수만도 없었다.
일이 없어도 회사를 나갔던가? 정말 피곤해지기 전까지는 집에 안 들어왔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아이 둘이 차례로 태어나자 모든 것이 원만해졌다.
당시는 출산 휴가가 두 달 밖에 없었고, 육아 휴직이란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집에 아내 역할을 하는 누군가가 있지 않고는 돌아가기 힘든 구조였다.
나의 아내, 어머님의 역할이 절실했다.
우리는 각자의 일을 하는 효율적인 가정 시스템을 만들었다.
어머님은 주중, 며느리 퇴근 전 아이를 돌봤고,
나는 퇴근 이후와 주말에 아이를 돌봤으며,
도우미 아주머니가 일주일에 몇 번 가사일을 해 주었다.
그리고, 남편은 틈틈이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삼촌 역할이었다.
당시에는 어머님도 나도 힘들었으므로, 주야장천 여행을 다녔다.
집에 있기가 싫었던 것 같다.
세단을 팔고 SUV를 샀다.
그리고, 남편은 스트레스 만빵인 아내와 어머니, 천방지축 아이 둘을 데리고
주말마다 전국 팔도로 짐을 싣고 운전하고 다니느라 나름 고생을 했다.
지금 봐도 당시 전국 팔도 여행 사진이 우라지게도 많다.
그리고, 그 시점에 나는 마침(!) 해외 업무를 지원했고,
될 수 있는 대로 기회를 많이 만들어 해외 출장을 가곤 했다.
업무의 부담감 같은 건
집을 떠나는 홀가분함에 비하면 댈 게 아니었다
떠나는 공항에서 여유롭게 비행기를 기다리며 듣던 음악과 맛난 커피,
그건 지금 생각해도 참 꿀맛이었다.
40대 파국이 왔다
그러다가 이제 아이들이 슬슬 자라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양육이 아니라 교육이 필요한 시점이 왔고,
할머니의 역할보다는 엄마의 역할이 훨씬 커져버렸다.
게다가, 이제 나도 살림 경험이 생기면서 내 의견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머님의 살림 방식이 백 프로 다 맞지는 않구나 하는
일종의 며느리 사춘기
이기적 며느리의 본성이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공평한 업무 분장이 불가능해지자, 서로 간에 불편함이 누적돼 갔다.
그리고, 마침 중국 주재원으로 발령.
자연스럽게 분가를 하고,
나는 결혼 18년 만에 비로소, 비록 외국에서였지만 독립된 내 살림을 시작하게 되었다.
50대, 다시 시작하는 동행
중국 생활 5년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이제 4년이 흘렀다.
어머님은 우리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에 계신다.
한 달에 몇 번 정도 같이 외식도 하고, 우리 집에서 내가 차린 밥으로 식사도 한다.
그럴 때 힘든 건 사실 음식 준비보다 어머님과 대화하는 일이다.
특히 아이들 대학에 갈 때, 뭔가 시험에 합격했을 때, 아무튼 축하할 일이 있을 때면
어머님은 그렇게 생색을 내신다. 아이들 키우느라 힘들었다고.
그리고 간사하게도 나는 그 말에 맞장구치는 게 그렇게 힘들다.
저녁에 퇴근하고 힘들어도 애들 데리고 자면서 밤잠을 설친 건 나였고,
주말 시간을 다 바친 것도 나였다고요.라고 외치고 싶다
하지만 참는다.
일찍 남편을 잃고 대견한 큰 아들 며느리 가족과 함께 살았던 어머님의
가장 빛났던 시간, 그리고 그 추억을 지켜주는 것,
그것이 며느리로서 나의 마지막 미션이다.
하지만 자주 뵙지는 않고 싶다.
나도 이제 내 정신건강을 챙겨야 하는 나이니까.
한 달에 몇 번 정도면 정말 족하다.
그래서 결론
요즘은 출산 휴가가 길어지고, 휴직도 비교적 자유롭다.
하지만 여전히 회사 다니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육아 때문에 서운한 마음으로 남편과 싸우다 결국 갈라서는 경우도 봤다.
친정 부모님이건 시부모님이건 같이 살아야 하나 고민하는 후배들도 많다.
그 친구들이 묻는다.
“시어머님 하고 어떻게 같이 사셨어요?”
나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다.
글쎄,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지.
이 경우는 맘이 편하냐, 몸이 편하냐 선택의 문제다
나는 감정 컨트롤이 센 대신 체력이 달렸던 쪽이라, 몸이 편한 게 더 좋았다.
하지만, 스스로 판단하기에 그렇지 않다면, 몸이 힘들더라도 본인이 껴안고 가야 한다.
본인에게 어느 것이 더 소중한 것인지, 판단과 결정의 문제다.
다시 그 시점으로 돌아간다면?
아니 잠깐.
난 그 전제가 마음에 안 든다.
미안하지만, 절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진실로 진실로, 한 번으로 족하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