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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씨 Jan 25. 2022

퇴사 일기 _ 집순이, 내 공간 리셋

이 곳은 "부림동 여유당"입니다

퇴사에 맞춰 이사까지 

지난 몇 년간, 부족한 체력을 아껴 쓰려 “직주근접”을 실행했었다. 

회사에서 차로 10분 거리, “서울의 배꼽” 삼각지에서. 

시내 한복판이라 역시 사통팔달, 출퇴근 및 주중 주말 약속 잡기에는 최적의 위치였다. 


꼭 직주근접이 아니라도 좋은 점이 많아서 계속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마침 집주인이 집을 팔았고, 새 주인이 들어오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

퇴사까지 한 마당에 복비와 이사비를 부담하면서 계속 떠돌 수는 없는 일.

마지막 출근 일주일 후, 경기도에 위치한 원래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처음 며칠간은 이삿짐들 제자리에 들여놓는 것에 몰두하느라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하루 24시간 집에 있어보니 집이 달라 보인다

그런데, 이제 나는 퇴사자. 

하루 종일 이곳에서 일도 하고, 휴식도 하면서 지내보니

이전에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던 것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그냥 저녁이나 주말에 편히 쉴 수 있고, 

기본적인 생활만 가능하면 큰 문제없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10년 된 TV는 너무 작고 촌스러워 보이고,

4년 된 냉장고는 요즘 유행하는 컬러풀 맞춤형 냉장고 대비 너무 옛날 것 같다.

소파만 덜렁 놓인 거실은 너무 휑하고, 그림 한 장 안 걸린 벽도 너무 삭막해 보인다.

화상 회의할 공간도 마땅치가 않다.


게다가 그놈의 “집들이”가 은근 스트레스를 준다.

이사도 했고, 주로 집에 있다니 

여기저기서 집들이하라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긴 것이다.


아니, 사실 내가 자처한 면도 없지 않았다. 

이제 시간 여유도 있는데 싶어서

 “그냥 편하게 우리 집으로 놀러 오세요”라고 

생각 없이 말했는데, 그게 어쩌다 보니 “집들이 초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바빠서 집을 돌보지 못했습니다”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면,

이제 나는 내가 꾸민 집으로 내 취향과 스타일을 평가받아야 하는 건가.


또 진지병이 도진다


 “TV는 10년 됐으니 이제 바꿔도 되지 않을까?”

“멀쩡한 냉장고지만 너무 거슬리는데 버리고 새로 할까”

“카페 느낌이 나는 식탁을 들여놓으면 어떨까”

“중문, 딱히 꼭 필요는 없지만 요즘 다들 하던데 나도 할까”


손을 대자니 한둘이 아니다.




원래 집에 관심 없던 스타일

사실 아닌 게 아니라, 평소 출근할 때는 

딱히 고장 나거나 불편하지 않으면 크게 손보거나 손대지 않고 살았었다.

인테리어나 가전, 식기들에 크게 관심이 있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가끔 엄청 잘 정돈되어 있는 집에 초대받아 가면 “우와” 하고 감탄은 했지만

내가 감히 흉내 낼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그러니, 나라는 사람은 

여자보다는 남자, 아줌마보다는 아저씨에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 어떡해.

이제 우리 집 대표 집사가 되었으니, 

이 공간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나름 투자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것도 이제 중요한 내 일이 되었으니.

그나저나 이게 무슨 회사 업무 분장 같은 생각이지?



 내 공간 컨셉 재정비 _ ‘부림동 여유당

집에 있는 2주일의 시간 동안 나름 좀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결론을 내렸다.


공간은 내 철학을 담는 곳이다
공간을 위해 내 철학을 바꾸지는 않겠다

내 철학은 

하나. 가전제품은 수명이 다 할 때까지 함께 한다. 

그것이 자연에도, 가정경제에도 이롭다.


둘. 빈 공간은 안타까워하며 채우려고 하지 말고, 그냥 넓게 쓰자, 여유롭게. 

그것이 내 정신세계에 좋고, 요가하기에도 좋다.


그런 의미에서 

컨셉은 실용과 여유,


이름은 <여유당>이라고 하자

그런데 이름을 정하고 보니 원래 실학자 정약용의 택호(宅號)라고 한다. 

역시, 선견지명이 있는 훌륭한 분이셨네.

그렇다면, 차별화를 위해 나는 내 공간을 “부림동(富林洞) 여유당(餘裕堂)"이라고 하겠어.

숲, 나무가 많다는 부림동이라는 이름이 꽤나 멋지기도 하고, 숲과 여유는 잘 맞는 조합이니까.


그래도 해보고 싶은 것

인테리어, 가전 같은 큰 것은 아니지만, 가지고 싶은 것이 있긴 하다.

그림.


몇 년 전, 우연히 들른 갤러리에서 한눈에 반한 화가가 있다.


탄자니아 미술가 핸드릭 릴랑가.  

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1/19/2015111902809.html

굳이 해설문을 읽지 않아도, 그냥 느껴지는 원시적인 생명력과, 밝고 희망적인 텐션이 좋았다.

이런 건 도대체 얼마나 할까.

직원에게 가격을 물어보니, 아래위로 흘끔흘끔 보면서 천만 원 정도라고 했다.

관심 있냐고 묻길래, 관심 있다고 하고 명함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 연락은 못했다.

처음 미술품을 사면서 천만 원짜리, 진품을 사기에는 조금 무서웠다.

이건 언젠가 하고 싶은 나의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다.

마음에 드는 화가의 진품 그림 사기.


그 첫걸음, 마음에 드는 아티스트의 작은 포스터라도 한번 사봐야 할 텐데.

그러던 중 바로 며칠 전, 옛 동료 모임에서 우연히 한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

로낭 부홀렉

https://mimostudio.tistory.com/135

쉐리프 TV 디자인에 참여한 산업 미술가라고 했다.  


검색해 보고, 약간 한눈에 반했다.

단순하고 컬러풀하고, 내가 좋아하는 생명력과 텐션이 느껴졌다.

조심스레 주문을 했다. 

다음 주면 배송이 올 것이다.


설렌다
소박한 내 공간에 뭔가 포인트가 되어 주겠지?

큰 투자는 아니지만, 내 마음에 기쁨을 주는 이런 소액 투자는 해야지.

이런 것이 진정한 여유가 아닐까.

야호 야호


내 공간도,

이제 내 맘 내키는 대로 해놓고 살자.


                                                    그림이 도착했다.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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